탁월함에 대한 욕망.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의 표제작인 <깊이에의 강요>는 한 젊은 여류예술가의 이야기이다. 가벼운 사교자리에서 한 예술평론가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고 평하였다. 아마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진 않았으리라. 본인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함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말은 그녀를 고뇌에 빠지게 했고 작품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선택하며 파멸에 이르고 만다. 글의 마지막에 처음의 그 평론가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고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시 한번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이라며 당혹감을 표한다. 화려한 언변과 미사여구로 그녀의 정신적 결함과 그것을 담고 있는 예술작품을 분석하며 죽음에 이른 원인을 분석하는 ‘척’하는 평론가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죽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싸지르는 평가와 판단이 어떤 파괴의 씨앗이 되었는가를.
같은 모음집 속 다른 단편 <승부>는 체스판의 노련한 고수 ‘쟝’과 비범한 한 젊은이의 체스 승부를 다루고 있다. 주변 체스꾼들에게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아주 지지부진하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얄밉게 이기는 쟝이었기에, 구경꾼들은 모두 그 젊은이의 승리를 바랐다. 체스 상식을 벗어난 수 싸움에 구경꾼도, 쟝도 모두 당황하고 젊은이가 둔 수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의 수에는 깊이가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 아름답다 생각하거나 경외를 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결국 노련한 쟝은 자신의 킹을 내주지 않았다. 글의 마지막에 승부가 나기 직전 젊은이가 스스로 자신의 킹을 넘어뜨린 무례는 무슨 의미였을까. 왜 승리한 쟝은 결코 복수하거나 보상받을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체스판을 물러나게 된 걸까.
깊이란 무엇일까. 깊이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길래 장래가 기대되는 작가를 자살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승리한 체스고수가 체스를 다시는 두지 않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까. 많은 이들이 글과, 그림, 영상과 음악, 움직임 등에서 깊이를 갈구하고 추구한다. 때로는 스스로, 혹은 타인에게 강요하기도 하는 듯하다.
깊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생각, 이론이나 작품이 있다. 때로는 남들이 생각지 못한 통찰력이 있는 과학적 이론이나 사상, 예술이나 문학 작품, 혹은 이를 만든 사람들을 깊이가 있다고 표현한다. 또는 광범위한 지식과 사고를 뽐내는 경우에도 깊이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음악이나 그림, 춤 같은 예술이나 문학, 연기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이목을 집중시킬 때 깊이가 있다 말하기도 한다. 때로는 배우의 눈빛이나 성악가의 목소리에서 깊이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깊이를 말할 때 단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나 분야는 철학일 것이다. 철학은 세계와 사람과 사고에 대한 사유를 쌓으며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말과 글을 전한다. 공부가 부족한지, 아니면 머리가 나쁘거나 요령이 없어서인지, 혹은 내가 깊이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철학이라는 분야, 철학자라는 부류의 사람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 철학하면 멋지다는 생각이 들고 이해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래서 겁 없이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던가 마샬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 같은 철학서에 도전했다 패배한 적이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깊이가 있는 것은 혹시 잘 이해하기 힘들게 쓰거나 말하는 어려운 무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깊이가 있다는 말은 그래서, 탁월하다는 말과 바꿔 쓸 수 있다. 통찰력이 있고, 창의적이며,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하거나,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때로는 어려운 사유를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이 모든 모습은 흔한 범인(凡人)에 속하지 않는 특성이다. 그러므로 결국 탁월해지는 일은 남들보다 나아지는 일로 귀결되는 듯하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에게, 또는 타인에게 깊이를 추구하고 강요하는 일은 남들보다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발현되었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이에의 강요>에서 비극에 처한 그 여류작가처럼 대다수의 우리가 탁월해지는 일은 쉽지 않다. 누군가는 나름의 로드맵을 딱 세워놓거나, 인생에 얻기 힘든 인연이나 경험의 덕으로 탁월함을 뽐내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의 우리에게는 탁월해질 수 있는 능력이나 운, 기회자체가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누군가는 내 위에 있고 누군가는 더 갖는다. 다른 이는 더 탁월한 업적을 쌓았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더 깊이가 있다. 누군가 노력의 문제라 말하고 누군가는 재능의 영역이라 말하며 또 누군가는 운이라 말한다. 그러나 어떤 식이든 스스로에게, 혹은 남에게 깊이가 있다고 평가받는 이는 극소수일 것이다.
때로는 “넘버원(No.1)이 아니라 온리원(only one)이 되어라“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개그지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외치며 탁월함을 쫓는 이들을 욕하기도 하였다-사실은 경쟁체제를 욕하는 개그였다-. 요즘 MZ세대 사이에선 “노력도 운”이라 는 체념이 만연하다고도 한다. 트윗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짧고 피상적인 감상만을 공유하고 쇼츠와 릴스 등을 끊임없이 넘기며 즉각적인 도파민을 충족하기도 한다. 그런 깊이가 없는 세태에 대해 쯧쯧 혀를 차며 아니꼽게 바라보는 어른들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깊이를 강요하거나 그 강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에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나 역시 때로는 깊이를 추구하며, 때로는 학문이나 세계에 대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의미 찾기가 삶의 화두였던 적도 있었다. 그럼으로써 남들보다 탁월해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체념하고 슬펐다. 그래도 뭘 어쩌겠나.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나 스스로를 너무 채찍질하지는 못하겠다. 그래서 대학원도 도망친 듯하다. 하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문헌을 근거로 들어야 하고 수리적으로, 윤리적으로도 엄격한 제한 속에서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일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엄격하게 요구되는 대학원 공부의 뜨거운 맛을 아주 조금이지만 보다 보니 이건 더는 잘해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는 앞으로도 깊이를 추구하는 욕망에 너무 취하지 못할 듯하다. 스스로에게, 또는 남에게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간혹 어려운 글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하겠고, 어떤 영화나 글을 보며 나름의 해석을 하려 이것저것 브레인스토밍도 해 볼 테지만,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여 깊이를 쫓지는 말자. 하루키가 <댄스댄스댄스>에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서툴지만 가볍게 스텝을 밟겠다 하였다. 나도 딱 그 정도만 하고 싶다-아, 하루키 정도로 글을 잘 쓰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은 아니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짧고 비루한 글도 구상하고 완성하는데 한 달이 걸릴 만큼 내게는 깊이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그래서 앞으론 더 가볍게 어깨의 힘을 빼고 글을 쓰려한다.
언어학 수업 중 중간에 쉬는 시간이었다. 스타워즈, 특히 요다를 좋아하고 “Are you sure?”라는 표현을 독특한 역양으로 자주 쓰시던 교수님이 계셨다. 내가 ’난 박사는 하지 않을 거예요. 얕도 넓게 대충대충 공부라고 싶어요‘라며 다른 학생에게 말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쉬고 계시던 교수님께서 끼어드셨다. ”그게 박산데? 박사가 얕고 넓게 공부하는 거야.“ 어이쿠. 당황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제는 그때 뭐라고 받아쳤어야 하는지 안다.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없이 더 얕고 좁게만 공부하고 적당히 집중하고 대충대충 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