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즈음까지 달리기와는 좋은 추억이 별로 없었다. 국민학생 때 태권도 승단심사에서 친구와 약속대련을 하며 서로 웃은 게 관장님께 들켜서 거대한 체육관을 스무 바퀴 넘게 돌았다. 너무 힘들어 펑펑 울었었다. 대학 때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공을 쫓다 앞으로 고꾸라져 무릎과 팔꿈치가 갈리기도 했다. 공군 훈련소에 입대했는데 달리기를 못해 둘째 날에 바로 귀가조치를 당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교통사고가 나 죽기를 바랐다. 겨우 육군에 입대하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체력이 약하다 하여 대대장이 선임들을 시켜 함께 빡쎄게 달리게 했었다. 그게 참, 휴우, 정말로 힘들었었다.
사춘기를 지나며 난 달리기를 정말 못했고 또 싫어했다. 조금만 빨리 뛰어도 호흡이 가파지고 옆구리가 콕콕 쑤시며 숨 쉬는 게 고통스러웠다. 허리와 종아리는 또 왜 그리 아픈 걸까? 분명히 사람마다 통증을 담을 그릇의 크기가 다를 것이다. 내 것은 작은 사발 정도밖에 안 되었다. 달리기는 내게 고통이었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일을 시작하고 허리가 안 좋아 아는 형님들에게 학교에서 무료 PT를 받았다. 복싱도 한 삼 개월 다녔다. 운동을 시작하고 체력이 조금 붙어서 그랬던 걸까? 아님, 그즈음 다이어트에 성공해 턱선이 날렵해진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부러워서였을까?
어느 주말 오후 근처 공원 트랙에 가서 그냥 달렸다. 오래, 빨리 뛰지는 못했다. 하지만 낡은 싸구려 조깅화를 신고 달리는 나 스스로가 기특했나 보다. 그 후 몇 년 동안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를 제외하고 꾸준히 달렸다. 나이키러닝 어플을 깔고 운동을 가르쳐 준 형님들과 친구를 맺고 조금씩 거리를 쌓아 나갔다. 물론 달리기는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달리며 듣는 음악이나 팟캐스트는 재미있었고, 어플에 기록들이 조금씩 쌓이는 성취감이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어플에 쌓이는 거리기록과는 무관하게 나의 달리기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가끔 정말 잘 뛰는 사람이 앞서 지나가면 그 사람을 언제까지 쫓을 수 있나 시험해 보기도 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뛸 수 있는지 시간을 재 보기도 했다. 그나마 달리기 전에 비해 호흡은 나아지고 옆구리 통증 같은 것도 줄어들었지만 그게 다였다. 300미터 트랙 10바퀴, 딱 3킬로미터가 한계였다. 조금만 무리해서 뛰고 나면, 예를 들어 인터벌 트레이닝처럼 빨리 뛰었다 천천히 뛰었다를 반복하고 나면, 다음날 두통이건 무릎이나 발목통증이건 분명 어딘가 고장이 났다.
이사 한 후에는 작은 언덕을 둘러싼 올레길을 달려보기도 하고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온 후에는 아파트 단지 외곽을 달렸다. 물론 그 사이 대략 10년 정도 흘렀고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년까지 쉬다 다시 달리고 쉬다 다시 달리고 했다. 그래도 조금 나아진 건, 아파트 단지 외곽이 2킬로미터 정도인데, 두 바퀴, 딱 4킬로를 뛸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내 몸속에 무언가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처럼 그보다 더 오래, 더 멀리, 더 빨리 달리지는 못하였다.
알고 지내는 한 후배는 대학원에서 교육학에 명상-요즘은 마음 챙김(Mindfulness)이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한다-이 줄 수 있는 효과 같은 것을 석사 논문 주제로 썼다. 그의 추천으로 관련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책에 따르면 마음 챙김의 시작이 호흡에 집중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달리기는 나에게 꽤나 격렬한 마음 챙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호흡에 집중하고 어떻게 하면 덜 숨이 찰지 고민하면서 달리니 말이다.
요즘은 엠피쓰리도 고장 나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지도 않아서 정말 말 그대로 옷만 입고 운동화만 신고 달리고 있다. 나이키러닝 어플을 안 쓴 지도 오래되었다. 나처럼 육아하느라 바쁠 텐데, 그때 함께 운동하던 형님들은 아직도 달리고 있을까?
달리다 힘들 때에는 아내와 아이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있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려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한다. 내 안의 열등감, 질투가 좀 더 선명해지며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보게 되고, 그게 위로가 되기도 한다. 알지 못했던 친구나 동료의 열등감을 깨닫고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달릴 때는 평소 내 안에 갇혀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엿볼 수도 있나 보다. 현실적인 고민도 하고. 때때로 글감 같은 것도 떠올라 반갑기도 하다.
가끔은 새벽에 달린다. 저녁에 달리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를 달린다. 평소 달리던 코스를 거꾸로 달린다. 잘 정비된 공원이나 하천의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도 한다. 이어폰을 끼지 않아 내 호흡과 발걸음 소리, 지나가는 차 소리와 천이 흐르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소리나 때로는 정겨운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 지면에 닿는 발의 충격, 가끔은 경직되고 불편하게 하는 목디스크의 통증, 조금 숨이 오르면 허덕이는 답답한 폐와 심장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심호흡했을 때 폐 끝까지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시원함, 셔츠가 땀에 젖어 가슴과 등 위로 살짝 들러붙는 촉감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어릴 때처럼 달리기가 마냥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늘지 않는 실력과는 별개로 이는 분명히 큰 변화다. 달리기에 좋은 추억이 하나둘씩 생기나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무척 좋아하여 많은 에세이집을 남겼다. 그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제목을 패러디하여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썼다. 나도 패러디를 패러디해야겠다. 이 비루한 글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짧은 이야기다.
덧.
윤상과 신해철이 함께 작업한 '노댄스' 앨범에 있는 '달리기'란 노래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근데 그게 원래는 '(매) 달리기', 즉 자살을 의미하는 노래라면 믿어질라나? 가사를 자살하는 상황으로 대입해 보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맞아 들어간다.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슬퍼진다.
아! 하나 더.
신해철에 따르면 윤상은 완벽주의적인 작업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부끄러운 게 90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게 10프로가 있으면 곡을 발매하는데, 윤상은 보여주고 싶은 게 90프로라도 부끄러운 부분이 10이 있으면 발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댄스'버전의 '달리기'와 윤상 베스트 버전의 '달리기'는 다르다. 뭐가 빠졌냐 하면 신해철 코러스가 빠졌다. 분명 '노댄스' 앨범 작업할 때부터 윤상은 그 코러스가 싫었을 것이다. 신해철이 감언이설과 떼를 써서 겨우겨우 앨범에 수록한 게 아닌가 상상해본다.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