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작가는 되고 싶지만 선뜻 노력하지 못하는
살아가며 글쓰기와 가까워졌다 다시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아주 조금씩 글을 써왔다. 하지만 항상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스티븐킹의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라던가, 조지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Why I Wirte)‘, 혹은 여러 유명 작가들이 쓴 ’작가란 무엇인가‘ 같은 글을 찾기도 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흥미로운 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 남들이 생각해보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글?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는 글? 자신의 속마음이나 감정을 보여주는 글? 브런치 스토리의 구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마법 같은 글? 하하.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 아니. 아마도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 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어떤 글을 쓰고 싶어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난 어떤 글을 써왔는지, 혹은 쓰고 싶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따라 판타지 소설을 구상하고 찔끔 써보기도 하였다. 아에로크(Aerok, 아이고 부끄러운 명명센스!)라는 국가에서 벌어지는 레디프라는 기사들의 이야기 뭐 그런 거였다. 이상한 머리띠를 하고 스타크래프트의 질럿이나 엑스맨의 울버린 같이 두 손등 위에 튀어나온 칼날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기사였다. 심지어 직접 그린 일러스트도 고향집 어딘가에 남아 있다. 주인공 이름은 내 이름 중 한 글자를 거꾸로 한 ‘그누이크(Gnuyk)’였던 거 같다. 전설적인 레디프였던 아버지의 죽음을 파해치며 훌륭한 레디프로 성장해 가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드래곤라자’라던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혹은 ’반지전쟁(The Lord of the Rings의 예전 우리나라 번역본 제목이었고, 나중에 제대로 완역이 된 ‘반지의 제왕’이 다시 출간되었다)‘이나 ’끝없는 이야기‘ 같은 환상소설과 무협지에 푹 빠져있었다.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재미있었던 거 같다. 마법이나 괴물, 마력이라던가 기, 신공 같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매력을 느꼈나 보다. 아마도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계획하여 결국 생존에 유리해지고자 인간은 의식(consciousness)을 발달시켜 왔을 것이다. 그 의식을 지니게 되면서 덩달아 생겨난 부산물이 ‘상상력’일지 언데 난 그 상상력의 힘에 압도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결국 그런 환상 속에서도 현실에서와 같이 사회가 흘러가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시스템, 인과관계, 도덕률 같은 것들은 다르지 않다는 걸.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였고 이야기의 힘은 거기서 나오는 건데 그때는 너무 어렸고 무지했다. 힘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 줄 몰랐었다. 세계관도 기차게 구성하고 일러스트도 그리고 열정에 불타는 시도 썼지만, 프롤로그 한 두 장 쓰다 그만둔 것으로 기억한다.
20대와 30대를 지나며 이야기글(narrative) 보다 설명하고 설득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학문적인 글(expository 혹은 academic 한)에 익숙해졌다. 과제용 보고서를 작성하고 읽은 챕터를 요약하는 아티클을 주구장창 썼다. 교육철학 과제로 썼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에 관한 서평은 그래도 똑똑한 후배 한 녀석에게 잘 썼다고 칭찬받기도 하였다. 뭐. 솔직히 나도 내가 뭔 소리를 썼는지 잘 이해는 못 했지만.
그래도 20대 초중반 무렵 감성이 넘치는 글들도 아주 조금은 썼다. 당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진 친구 놈의 손에 이끌려 그 늪에 덩달아 빠졌었다. 풍성하지만 무언가 모호한 감정이 흘러넘치는 문체와 앙상하게 위태롭지만 굳건하고 초연한 인물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하루키의 문체를 따라 하며 하루키를 소개해준 친구를 죽인 단편이나 골방에서 담배 피우는 찌질한 나를 주인공으로 한 글들을 몇 편 썼었다. 다행히도/불행히도 그 글들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간혹 읽다 보면 키보드를 부숴버릴 정도로 부끄럽고 오그라듦을 느끼지만 그래도 내 인생의 가장 낭만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들이어서 차마 삭제하진 못하고 있다.
30대 중반 즈음에는 온라인으로 100일 동안 글쓰기 프로그램 같은 것에 참여해보기도 하였다. 프로그램을 주최하신 분이 메일로 매일 키워드 몇 개를 던져주면 그중 하나를 선택해 형식과 길이에 구애받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당시 블로그에 썼던 비공개 글 제목들은 ‘복도,’ ‘열정,’ ‘태양계,’ ‘도둑맞은 경험,‘ ’브로콜리,‘ ’사과,‘ ’택시‘ 같은 키워드였었다. 안타깝게도 2월 말 봄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에 시작했는데 3월 새 학기가 지나며 버티지 못하고 금방 관뒀다.
겨우 짧은 기간 동안만 하루키를 따라한 순수문학이나 에세이 형식의 글을 써보았던 나는 그 후에도 학문적인 글쓰기를 주로 하였다. 더욱이 우리말보다는 영어로 글쓰기를 강제당하여 지금 생각하면 좀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도 석사논문심사 때 교수님들께 쉽지 않은 주제를 가독성 있게 잘 썼다는 칭찬은 받아 뿌듯하긴 했다. 아마 내 영어실력이 비루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뭐…
그러나 당시 내 글은 너무 기계적이었고 그래서 딱딱했었다. 운이 좋게도/나쁘게도 당시 교수님께서 하시는 과제연구에 보조원(혹은 시다바리)으로 참여할 기회를 주셨는데, 그때 초중고등학교 교사 2,000여 명에게서 받은 설문결과를 바탕으로 결과 해석을 써야 했다. 교수님께서 집어주신 포인트 몇몇 개를 가져다 밤을 새워 써 내려갔는데, 당시 연구 인터뷰와 회의, 식사하며 가진 사담 등에서 나는 교수님의 생각을 거의 체화하였던 거 같다. 물 흐르듯 글이 써지는 경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를 그냥 쏟아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어서였으리라. 말 그대로 기계처럼 타이핑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글쓰기는 내게서 멀어졌다. 아이를 가지고 육아와 일을 하는 정신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이를 보며, 하지만, 아빠의 인생을 기록하고 들려주고 싶은 욕구가 생겨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당시 말라비틀어졌던 감성에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물을 줘서인가. 무턱대고 스마트폰으로 구글 문서 앱을 켜 ‘아빠가 사라졌다’라는 문장을 쳤다. 2022년 가을 나의 글쓰기는 이 글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장에서 시작한 글은 상상력을 밑거름으로 뿌리를 내려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내가 겪은 이야기를 각색하기도 하고 누군가 겪은 이야기를 양해를 구하고 빌려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마법의 가을은 사라졌고 다시 서글픈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글은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했던가? 아이를 재우고 손가락을 움직여 글을 써 내려갔던 습관은 유튜브와 웹툰에 의해 무너졌다. 일과 육아에 지쳤다는 핑계로 올해 여름까지 나는 다시 글을 놓았다.
그러다 이번 여름, 속초여행을 하고 꽤나 고난스러웠던 방학 후반을 지나며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저 꾸준히 글을 쓰고 싶다, 혹은 글을 써야 한다는 스스로의 바람만 있었다. 브런치 스토리에서 글을 활발히 쓰고 있던 친구-일과 육아와 학업과 글쓰기를 병행하는 아주 독한 놈이다-의 추천으로 두 번의 고배 후에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작년에 쓰다 멈춘 글도 올리고 여행 글도 올리고 있는데… 아직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간사한 인간인지라 저조한 조회수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 구독자 수에 자존심과 동기가 꺾이기도 한다. 과거에 썼던, 그나마 읽혀도 덜 욕먹을 만한 글도 다 고갈되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애초에 누군가에게 나를 보이고픈 마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심지어 아무도 모르게 쓴 일기장도 죽은 후에 누군가 그 일기장을 발견한 이를 독자로 상상하며 쓰는 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나를 알리고, 공감받고, 인정받고 싶어서가 이곳에서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내가 지금까지 썼거나 쓰려고 했던 소설, 보고서, 아티클, 에세이는 결국 내 지인, 교수님,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랐던 마음의 결과물들이었다. 지금 쓰는 글과 이곳에 앞으로 올리는 글도 가까이는 내 아내와 친구들, 몇 되지 않는 내 브런치 스토리를 찾는 사람들, 멀리는 나중에 커서 내 글을 읽을 사랑스러운 딸을 위해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쉽지 않다. 세상의 모든 경계는 흐릿하여 어느 누구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뇌 속 수천억 개의 뉴런 신호가 모여 인간의 의식이 되고, 중앙 명령체계가 없는 개미 군단은 스스로 다리를 만들어 나무 사이를 건넌다. 그러나 그러한 양적 변화가 어느 임계점(singularity)을 지나 질적 변화를 이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뺨과 턱은 어디를 경계로 나뉘는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머신러닝 알고리듬 블랙박스 속 매개변수의 가중치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수학적 통계 모델링을 통해 근사치는 구할 수는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근삿값일 뿐이다. 인간의 언어는 결국 현상의 표피만 덮을 뿐이다. 그것도 수많은 구멍이 있는. 내가 보고 느끼는 것, 내가 보여주고 말하고 싶은 것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중고등학교 때 압도되었던 상상력의 일부만이라도 잡을 수 있다면, 달팽이 안단테를 읽으며 치유받았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을까. 그거면 될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 글은 내가 올린 브런치 글을 광고하는 광고글이라 할 수 있다.
덧. 100일 동안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처음 쓴 글이 ‘복도’였는데, 최근에 쓴 비루한 단편소설 ‘침범’의 소재가 된 고등학교 때 친구에 관한 내용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 단편의 뿌리가 이 글이었다는 게 신기해 부끄럽지만 아래 첨부하였다.
복도 (2015년 2월 23일)
복도는 영어로 corridor라고 한다. 예전에 즐겨 듣던 Eagles의 거의 유일무이한 대표곡 Hotel California의 가사에서 처음으로 들었고, 술을 의미하는 spirit과 함께 그 가사에서 암기하게 된 단어이다.
아마 복도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거의 대부분 학교 복도를 상상할 것이다. 나는 학교 복도와 관련하여 대충 두 가지의 인상 깊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고등학교 때 한 학생을 미행한 것이다. 어느 학교에나 약간의 자폐기를 가지고 있고 사회성이 부족한 학생들이 있는데 그 친구 역시 학교에서 남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는 그런 학생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그는 항상 복도를 어슬렁거렸는데 모습이 꼭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 같았다. 호기심에 어느 날 그 친구의 뒤를 밟았는데 그는 사람이 적은 층의 복도를 골라 다녔고 특히나 내가 뒤에서 따라온다는 것을 의식한 듯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이내 걸음을 빨리하였다. 그 학생이 무슨 상처로 인해 말을 않고 점심시간에 복도를 걸었으며 사람을 피했는지,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그가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그의 상처가 아물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인상 깊은 기억은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아마 3교시가 끝날 때 즈음이었고 나는 따로 수업이 없어 교과교실에 앉아 이것저것 업무를 하고 있었다. 수업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그 소리에 맞춰서 멀리서부터 학생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밀려왔다. 아마 파도가 높은 바다를 본 적이 있거나 딥임팩트 류의 재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저기 멀리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가오는 섬뜩한 해일의 모습을. 복도에서 울리는 소음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전부 집어삼킬 기세로 멀리서부터 슬금슬금 다가오듯 커졌고 그 크레셴도 crescendo는 정말.... 정말 무서웠다. 뭐. 아직까지는 5년째 잘(?) 버텨오고 있다 다행히도... 가끔 학생들이 하교한 후에 텅 빈 복도를 보면 그들이 남기고 간 생동감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곤 한다. 마치 짠 바닷물같이. 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