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아주 많이 각색한 단편 소설입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 인물, 사건들은 허구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장소 등과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1.
나는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 N을 만났다. 아내와 두 딸이 친정에 가서 시간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지만 각자 일과 육아 같은 일상에 치어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려운데 용케 시간이 맞았다. 오코노미야키와 하이볼을 시켰다. 음악과 영화 이야기, 첫 해외여행에서의 여러 장면, N의 군대 외박 때 같이 노래방에서 퀸 메들리를 불렀던 추억을 나누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N과 나는 고등학교 때 함께 지낸 친구들의 기억을 하나씩 소환하고 있었다. 야동을 좋아하던 색마, 선산군에 살고 있어 멀리 통학하던 선산, 교실 형광등에 손이 닿을 정도로 키가 큰 다마, 진동, 짠쉐, 영쉐, 구돼지, 개돼지, 짜일럿, 잣뜨 등등. 이제는 뜻도 기억나진 않지만 아직도 소리 내어 발음하면 입에 착 달라붙는 별명들이었다. 갑자기 N이 물었다.
"혹시 너 준모라고 기억나냐?"
"어. 당연하지. 그 말 없고 쉬는 시간에 복도 배회하던 걔."
당시 남학교였던 A고등학교 3학년은 총 8개 반이 있었는데, 1반과 2반은 문과반이었다. N과 나는 2반이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겠지만 한 반에 45명의 학생들이 바글바글 생활하고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나 나나 45명의 이름과 얼굴, 특징을 모두 떠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박준모란 아이는 꽤나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아마 거의 모든 2반 동창들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존재감 없이 생활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가장 존재감이 커진 아이였다.
"나 걔 쉬는 시간에 뒤따라 가본 적 있었거든."
"너도냐? 나도 한번 따라가다가 들켰었는데."
아침에 등교한 후에 종례를 마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유일한 학생.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항상 학교 구석구석을 배회하는 친구였다. 친구? 준모와 나의 관계를 친구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같은 학교 동문이긴 하지만 그와 한 턴(turn) 이상의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지 않을까? 그래도 마음 한편에 혹시 내가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 준모가 알았다면 대단히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정체 모를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N과의 술자리를 파하고 집에 도착하여 아기를 재웠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아내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에 이를 닦고 잠자리에 들었다. 불 꺼진 방에서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나는 준모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파트 밖 주차장에 자동차 후미등의 붉은빛이 어두운 방 창문을 흐릿하게 타고 들어와 천장을 붉게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