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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Nov 21. 2023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것.

아이는 오늘이 제일 예쁘다.


내가 처음 아이를 안았던 기억은 대략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다. 동네 어떤 아주머니의 갓난아기였는데 포대기로 업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안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품에 안아보았다. 제대로 아이를 못 안았던 건지, 포대기를 잘못 묶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마터면 아이가 등뒤로 고꾸라져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아이의 머리를 받쳐 큰일은 면했었다. 큰 사고를 칠 뻔했다.


아직도 4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아기였을 때 내가 안고 있는 사진이 앨범에 여러 장 남아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꽤나 우량아였던 동생을 그래도 형이라고 잘 안아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 역시도 어렸던 시절이라 동생을 들거나 업지는 못했다. 그저 두 다리로 버티고 설 수 있게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안고 있거나, 내가 앉은 자세로 위에 동생을 얹은 정도였다.


2021년 4월 집 근처 산부인과에 도착한 지 약 3시간이 지난밤 11시 무렵 아이는 태어났다. 아내가 진통을 할 때 옆에서 손을 잡고 도왔는데 어느 시기가 도래했는지 의사 선생님께서 나를 입구 쪽 커튼 밖으로 내보내셨다. 짧지만 긴 기다림의 시간이 지났다. 보진 못하고 소리만 들린다는 게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고통에 찬 소리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들의 말소리 사이에서 어느 순간 또 다른 소리가 섞였다. 새로 태어난 존재는 말 그대로 ‘짠!’ 하고 나타나 “응애”하고 울었다. 무언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것도 잠시 나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다시 커튼 너머로 들어가 벌거벗은 아이의 배에 연결된 탯줄을 잘랐다. 아이를 간호사에게 맡기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설레고 두렵고 기쁘고 떨리는 여러 감정을 서로 교환했다.


수술실 가운 같은 초록 포대기에 싸인 아이를 처음으로 품에 안았다. 기록에는 2.7킬로그램으로 적혀 있었는데, 당시에는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떻게 안아야 할지도 몰라 엉거주춤하게, 혹시 부서지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게 안았다. 포대기 천의 거친 느낌 사이로 희미하게 아이의 온기가 와닿는 듯했다. 그 후 지쳐 누워있던 아내가 아이를 안았고 간호사께서 처음으로 세 사람이 함께인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비록 코로나 시국이라 아내와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병균이라도 옮길까 아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도 못했고 아이를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다. 정신없고 낯선 첫 포옹 이후에 우리는 잠시 헤어졌다.


아이는 바로 신생아실로 보내졌고, 나는 며칠 후 이른 아침에 산후조리원에 갈 때가 되어서야 다시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4월 말이었지만 혹시나 추울지 몰라 아이는 속싸개 위로 두꺼운 겉싸개까지 한 상태였다. 여전히 너무 가벼워서인지, 혹은 내 아이를 안았다는 긴장과 설렘 때문인지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겉싸개 한쪽 모서리에 붙어 있는 모자가 아이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살짝 들춰보니 푹 파묻힌 아이의 얼굴은 정말 말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조그마하고 신기했다. 짧은 거리였지만 산후조리원 원장님의 차로 이동했고 차 안에서 한동안 아이의 얼굴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당시 심각했던 코로나로 인해 나는 산후조리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다. 아내는 2주 간 머물렀는데 첫 주에는 혼자 있었고 5일 정도 후에 내가 입소하였다. 밖에 있는 동안 매일 저녁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며 아이가 젖병을 빠는 신기한 모습을 화면으로만 지켜봤다. 입소 후에 처음으로 아이를 안았다. 아직 속싸개에 싸인 아이는 어느새 눈을 떠 여러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엉거주춤 두 손으로 아이의 목덜미와 엉덩이를 받쳐 안아 올렸다. 그때까지 신생아가 목도 가누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직 목을 제대로 못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이를 안는 게 더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내친김에 분유도 먹여보고 트림도 시켜보았다. 쉽지 않았다. 고난이 예견된 체험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 나는 안는 법을 몰라 참으로 불편하게 아이를 안아 올렸다.


산후조리원에 있으면서 산부인과에 붙어있는 소아과에서 신생아 검진을 꼭 받아야 한다고 하여 400여 미터 거리를 아이를 안고 걸었다. 당시까지 회복이 덜 된 아내는 불편하게 걸어야 했고, 나는 혹여나 아이를 놓칠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보통 걸음으로 10분 정도면 도착할 거리를 15분은 넘게 걸려 갔었다. 소아과에 갔다 다시 산후조리원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각자의 이유로 진이 빠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육아를 시작하고 특히, 아이를 재울 때 많이 안아주었다. 다행히 미디어에서 보았던 것처럼 엄마 아빠의 손을 많이 타는 아이는 아니었다. 심한 아이들은 엄마가 하루 종일 안고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우리 아이는 역류방지 쿠션이나 아기침대에 눕여 놓고도 잘 지냈었다.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되집기를 하고, 허리를 튕겨 철퍼덕하며 기기 시작하다 어느샌가 두 팔과 두 다리를 번갈아 바닥을 밀며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안아 올리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내 허벅지 위로 올라와 안아달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동그란 얼굴을 한껏 위로 치켜들고 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누가 지칠까. 이제 조금 무게감이 느껴졌고 때로 자지 않으려 엉엉 울 때면 30분 넘게 1시간 넘게 아이를 안아 달랬다. 팔이 아프기도 했지만 여전히 폭 안으면 품에 들어오는 느낌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돌이 지나고 아이가 두 번째 가을을 지낼 무렵 손을 잡고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유모차를 두고 산책을 많이 나갔다. 걷다가 자주 안아달라고 칭얼대기도 하였다. 이제 한 손으로 안고 버티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체중이 늘었다. 두꺼운 패딩에 팔로 아이를 감싸기가 불편해지기도 하였다. 아이의 근육이 더 발달함에 따라 안기기 싫거나 생떼를 부리며 몸을 튕기면 안고 버티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스스로의 의지로 내게 더 포옥 안길 수도 있었다.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싸고 매달릴 수도 있고 때로는 한쪽 어깨에 얼굴을 파묻을 수도 있게 되었다. 때로는 아이를 내려놓을 때 두 다리로 내 가슴을 감싸 그러지 말라고 버틴다. 두 돌이 지날 무렵에는 깜깜한 밤 자기 전에 내게 안겨 “아빠가 얘기해 줘”라며 말하는 게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야기 하나 끝나면 또 “아빠가 얘기해 줘,“ 이야기 하나 끝나면 또 ”아빠가 얘기해 줘 “라고 끊임없이 말하긴 했지만.


이제 31개월을 바라보는 아이는 여전히 내게 잘 안긴다.


그러나 미래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지난주 수능감독을 함께 간 선배 교사는 내년에 초등학생이 되는 7살 딸이 있다 하였다. 6살이 되면서 성별에 대한 관념이 뚜렷해지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딸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자유를 찾았지만 뭔지 모를 아쉬움과 허탈함을 느꼈다고 하였다. 특히, 코로나 시기를 보내며 뽀뽀와 같은 스킨십을 자제하는 거리두기 교육을 받고 자라 아빠와 뽀뽀도 잘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은 딸이 가장 싫어하는 게 아빠와의 뽀뽀인데 이를 이용해 아이를 훈육한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슬픈 그늘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한 때 재미있게 보았던 <아빠와 딸의 7일간>이란 일본 드라마는 힘든 회사 일을 마치고 30년 은행 대출로 산 집에 터덜터덜 걸어오는 중년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제 고등학생이 된 딸은 아빠에게 용돈을 올려달라는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한다. 아빠 주변 3미터 안에 방어막이 쳐져있는 듯, 딸은 아빠를 피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기 힘든 집에서, 그래서 어두컴컴한 골방에서 노안이 온 남자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아빠를 사랑한다, 아빠와 결혼하겠다 말하는 딸의 어린 시절 비디오를 본다. 딸을 안아준다는 건. 그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그 드라마는 어떤 사건으로 아빠와 딸의 영혼이 바뀌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관계가 회복된다는 해피엔딩이다. 다행이다.


몇 년이 지나면 쉽게 아이를 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운이 나쁘면 나를 너무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고, 운이 좋으면 가끔 손을 잡는 거 정도는 허락할 정도가 되려나. 그리고 거기서 몇 번의 운이 겹치고 우리의 관계가 너무 멀어지지 않았다면 아이가 철이 들 무렵 머리가 쇤 나를 안아줄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힘들어도 많이 안아줘야겠다. 오른쪽 견갑의 통증 때문인지 팔이 계속 저릿하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지.


천을 따라 달리다 보면 중간에 예쁘게 꾸민 문구를 몇 개 볼 수 있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문구가 하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신은 오늘이 제일 예쁘다.


아이는 오늘이 제일 예쁘다. 아무리 줘도 부족한 사랑이겠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듬뿍 사랑해 줘야겠다. 언제까지 내가 안아줄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터미타임(Tummy Time): 아이가 깨어있는 시간 동안에 잠깐씩 엎드려 놓아 아이가 목을 가눌 수 있게 연습시켜 주는 것(출처: https://www.hugmom.co.kr/hugmom/media/magazine.html?bmain=view&uid=8&m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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