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죽음.
이 글은 신해철이라는 뮤지션의 일대기를 다루거나 그의 음악에 관해 심도 있게 비평하는 글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제 인생의 선에 굵은 점을 여러 개 남겼던 인물에 대해 추억하는 가벼운 글 정도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그에 관해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3.
전역 후, 난 신해철의 음악과 꽤 멀어져 있었다. 넥스트 5.5집 Regame에 실린 자가 리메이크 곡들은 크게 끌리지 않았다. 아마 앨범에서 유일한 신곡이었던 걸로 기억하는 ‘The Last Love Song’만 그나마 좋아했었다.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솔로 재즈 앨범 The Song for the One을 냈길래 사긴 했지만 몇 번 듣지 않았다. 복학 후 발매된 넥스트 6집 666 Part 1이란 기이한 앨범은 딱 한 번 스트리밍으로 듣고 말았다. 어떤 곡이 있었는지, 어떤 멤버로 라인업을 짰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음악보다는 오히려 인터넷 신문 사회면에 더 자주 등장했던 것 같다. 교육을 비판하던 사람이 사교육 광고를 찍었다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고, 100분 토론에서 대마초 문제 같은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연예인 치고 꽤나 많이 출연해 오해를 살만한 멘트도 날렸다. 많은 루머와 오해들로 음악 외적으로 그는 꽤나 상처받고 있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그의 논리 정연한 해명, 혹은 변명을 차분히 들을 만큼 그를 사랑했었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그의 변호를 자쳐하곤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정과는 별도로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그는 한번 무너졌다. 실제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2002년 대선 때의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했다. 그땐 정치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고, 그의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 노통의 서거 이후 정치에 관해 관심을 가졌고, 신해철이 외쳤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는 그 사회에 부채감을 가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에 따른 사회적 책무를 감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짙은 개인적 자유주의자의 모습으로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한, 사회는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우리 모두는 어떤 차원에서는 약자일 수 있으므로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런 메시지 중에 많은 생각들은 어느새 나의 혈관을 타고 다니게 되었고, 나는 그와 비슷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영어 단어 like는 동사로 ‘좋아하다’는 뜻이 있고, 또한 전치사로 ‘~처럼’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두 뜻은 아마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해철이란 인물을 ‘좋아하‘면서 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싶은 나를 보면 말이다. 또한, identity(정체성)란 명사는 identify(식별하다; 일체감을 가지다)란 동사와 같은 어근을 공유하는데, 결국 자신의 ‘정체성’이란 자신이 바라보는 누군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거나 일체감을 가지는’ 태도에서 형성되는 게 아닐까 한다. 과거 그의 노래에 담긴 의미에서부터 세상과 자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데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한쪽 귀 뒤에 큼직한 뱀 문신을 하고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냈다. 추모식에서 울분의 ‘그대에게’를 부르며 쌍욕을 하기도 하고, ‘Goodbye Mr. Trouble’ 같은 곡이나 영화음악 작업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여전히 내 귀에 들리지 않았고, 간혹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의 예전 앨범을 뒤지는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고 있었다. 5대 5 가르마를 탔던 동기는 이맘때쯤 이제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더 이상 그에게 새로움을 기대하지 못하게 된 건지, 아니면 절실함이 없어진 건지, 아님 감정이 메말랐던지, 내 안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나 보다.
그 사이 내 인생은 크게 변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14년 그가 새 솔로 앨범 Reboot Myself와 새로운 넥스트 체제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2000년대 후반과는 다른 에너지를 느꼈던 것 같다. 아마 그도 내 인생만큼 큰 변화가 있었던 걸까? ‘A. D. D. A.’의 1인 아카펠라는 아카펠라로 여길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베이스 댐핑을 들려주며 그의 건재함을 드러냈다. ‘Catch me if you can(바퀴벌레)‘ 같은 빠른 비트에 “다 쥬기자, 싹 다 쥬기자, 몽땅 쥬기자, 바퀴벌레 쥬기자“같은 위트 있는 가사는 ’남태평양‘의 “아헤야 꾼다꾼다 되거나 말거나 꾼다꾼다” 같은 재미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새 앨범을 내고 얼마 뒤인 2014년 10월 27일 그는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그 며칠 전, 그가 사경을 헤맬 때도 나는 학교에서 방과 후에 아는 형님과 운동하며 가볍게 “뭐 괜찮아지겠죠”라고 말했다. 그 뒤 서태지가 오랜만에 출연한 티브이 방송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할 때,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난 무척이나 미안해졌다. 단순히 그의 음악을 놓고 있어서는 아니었으리라. 어느샌가 그를 내 우상이 아니라 미디어에 비치는 연예인으로 바라보게 되어서 였을까.
익숙해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민물장어의 꿈‘ 중)
https://youtu.be/BtXGZ4ZPKBI?si=z6b1--x4XbuVGY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