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 이해에 관하여.
우리는 ‘이해한다’는 말을 많이 쓴다. 어떤 글이나 정보가 뜻하는 바를 알게 되었을 때, 자신 혹은 타인의 생각, 감정, 마음을 읽을 때도 이해한다고 표현한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는 “네 마음을 이해해.“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할 때는 ”네 사정은 이해하지만.“ 교실에서 잘 배웠는지를 묻고 답할 때는 “이해했니?” “네.”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로 이해했다는 게 무슨 뜻일까?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이해(理解)란 첫째,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한 상태, 둘째로 ‘무언가를 깨달아 알게’ 되는 상태, 셋째로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쉽게 그 뜻이 와닿지 않는다. 영어 단어로는 보통 understanding 혹은 comprehension이라 한다. understand라는 동사를 뜯어보면 누군가의 아래(under)에 선다(stand)고 할 수 있으니 이는 우리말 이해의 세 번째 뜻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뜻한다(put oneself in one’s shoes). comprehend는 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면이 있다. ‘함께’라는 의미의 접두어 com-가 라틴어로 ‘잡다, 취하다’라는 뜻을 가진 prehendere와 합쳐진 단어다. 즉, 어떤 현상이나 상황에 관해 마음속으로 무언가를 얻어낸 상태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단어의 뜻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우리가 어디까지 사고하는 것이 이해하는 것인지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겨울 방에 창문이 열려 있다. 추위를 많이 타는 A가 창문 옆에 앉아 있는 B를 바라보며 ”으, 엄청 춥다.“라고 말을 한다. 만약 A가 한 말의 표면적인 뜻만 B가 이해했다면, A의 체온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으로 이해의 행위는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만약 B가 사회문화적인 배경지식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친절한 사람이라면 A가 한 말의 의도를 파악하고 창문을 닫을지도 모른다-이런 연구를 하는 언어학을 화용론(Pragmatics)이라 한다-. 즉, 이해한다는 행위는 단순히 단어와 문장의 배열, 혹은 주어진 상황 그 자체를 파악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경험 속에 있는 사회문화적 지식이나 표현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는 일 등 역시도 이해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다.
너무 추상적이고 넓은 이야기라 교육학적인 차원으로 범위를 줄여 보자. 사실 학습하는데 이해란 그렇게 고차원적인 사고행위는 아닐지도 모른다.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블룸(Bloom)이란 교육학자가 나눈 학습의 위계에서 ‘이해하기’는 제일 아래 차원에 위치한 ‘기억하기’의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다. 학습자가 하는 사고의 차원에서도 무언가를 이해한 후에 ‘적용’하고 ‘분석’하고 ‘평가’하고 ‘창조’하는 더 높은 차원의 사고 과정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해하기‘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여러 분야에서 연구가 되어 왔다. 필자가 전공한 영어 읽기 이해(reading comprehension) 분야에서도 이해에 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중에 월터 킨치(Walter Kintsch)라는 학자가 주장한 상황모형(situation model)은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계별로 단순화시켜 이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그의 상황모델에 따르면 어떤 글을 읽을 때 머릿속에서는 크게 세 단계로 이해가 진행된다고 한다. 첫째는 눈을 통해 입력되는 단어들의 개별 형태를 파악하는 단계(surface form representation)이다. 이때 우리는 읽고 있는 글의 개별 단어를 파악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단어 지식(lexicon)에서 그 의미를 끄집어낸다. 재미있는 주장은 어떤 단어를 읽는 그 순간 우리가 읽는 글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머릿속에 저장된 여러 표상(representation)이 동시다발적으로 좌악 떠오른다는 점이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자면, can이라는 단어를 읽을 때, 이 단계에서 우리의 뇌는 ‘할 수 있다’는 조동사, ‘통조림‘이라는 명사, 혹은 ’통조림을 따다‘는 동사, 혹은 그 외에 다른 뜻이 있다면 그러한 것까지 무비판적으로 떠오른다. 아마 뇌 속에 수없이 많이 연결된 뉴런 중에 can이라는 철자를 인지했을 때 함께 떠오르는 여러 가지 전기 신호들을 뜻하는 듯하다.
표면적인 표상이 떠오름과 동시에 우리 머릿속에서 개별 의미들을 다층적으로 묶은 명제(proposition)가 구성된다고 한다. 이를 말뭉치 표상(textbase 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최소한의 추론(minimal inference)을 하면서 앞의 내용이라던가 뒤에 나올 내용의 추정에 근거하여 무비판적으로 떠오른 여러 표상들을 갈무리하고 관련 있음직한 의미만을 남긴다. 명제란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특정한 의미 덩어리라고 하는데 사실… 그 의미는 애매모호하고 오묘하고 이상야릇하다. 여하튼 이러한 명제들 중에 무언가 자주 반복되거나 다른 여러 명제들과 많이 연결된, 중요해 보이는 명제들은 매크로 구조(macrostructure)가 되는데, 어떠한 글의 가장 중요한 매크로 구조는 당연하게도 그 글의 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명제 사이의 계층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면서 세 번째 단계로 상황모형(situation model)을 만들게 된다. 이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 글을 읽는 습관, 개별적 추론 방식, 글을 읽을 때의 감정 같은 것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서 개개인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글의 일관성을 만들어 나간다-coherence building-.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의 차원을 나눠주는 모델로 사건-색인화 모형(event-indexing model)이 있는데, 주인공(protagonist), 시간(time), 공간(space), 인과성(causality), 그리고 의도성(intentionality), 이렇게 5차원으로 나뉜다. 그리고 매 순간 구축되는 상황모형은 글을 읽어나감에 따라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결국 이 단계를 거치며 우리는 같은 글이라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도 아직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제대로 알려주는 데에는 한참 부족하다. 상황모형은 주로 이야기글(narrative)에 한정되어 있다. 실제 우리는 설명문이나 시, 매뉴얼 등 훨씬 다양한 장르의 글을 읽는데, 이런 글의 이해를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논리학에서 빌려온 명제(proposition)라는 개념 역시도 분명하게 정의 내리기 힘들다. 참고로, 필자가 쓴 석사 논문에서도 명제 분석이랍시고 뭔가 하긴 했는데 도대체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허접한 분석이었다. 이런 일을 벌여놓고 다행히 들키지 않고 대학원을 빨리 도망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또, 이 주장은 오직 글을 읽는 데에만 한정되어 있다. 우리는 글뿐만 아니라 어떤 장면, 소리 같은 다른 감각을 통해서도 이해를 하는데, 이런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 아이고 너무 많다. 또 있다. 이 모형은 말 그대로 추상적, 이론적인 모델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특정 글을 어떻게 얼마만큼 이해했는지 보여주지 못한다. 솔직히 뇌를 열심히 찍고 분석해 보아도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긴 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예컨대 글을 어떻게, 얼마큼 이해했는지를 직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 학교에서 우리가 하거나 받는 읽기 평가는 실습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간접평가라 할 수 있다. 읽은 글을 바탕으로 정답을 찾는 선택형 문제라던가, 글로 써내려 가는 쓰기 평가, 혹은 구술로 이해한 내용을 설명하는 평가 정도가 다일 것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필자의 지도교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이 있다.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인용하셨는데, “자신이 어떤 것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5살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준으로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음… 그렇다면 지금 필자가 쓴 이 글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https://youtu.be/3smc7jbUPiE?si=SMp5GfJ4siJwbH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