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에 처음 시행된 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은 대학 입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시가 강화되고 학생부 전형이 복잡하게 흘러가며 현재 수능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게이트키퍼로써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고 수능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수능 영어 역시 처음 도입된 이래 변화를 겪어 왔는데요. 2013년 A/B형 수준별로의 일탈을 꿈꿨다가 1년 만에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부터 한국사와 더불어 딸랑 수능 영어만 절대평가로 전환되며 논란이 되었습니다. 절대평가의 근본적인 목적은 '개별 학습자가 학습을 통해 교육에서 목표로 하는 수준에 올랐는지를 평가하는 것'인데, 수능 영어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각자의 목적이 뒤섞여 그런 취지에 제대로 부합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수능 출제위원과 공교육 관련자들은 영어 교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줄어들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쉽게 문항의 난이도를 조정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줄어든 영어 시장의 공백을 국어와 수학이 채우는 현상이 나타났죠. 학생과 학부모 역시 어느 장단에 맞춰 공부를 해야 할지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올 초 대통령실의 킬러문항 관련 언급과 그에 따른 논란, 2028 대입제도 개편안에서 수능 영어가 오히려 약간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는 점은 나름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대학입시는 우리나라 교육을 말할 때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순수하게 수능 영어 문제가 어떤지 말하는 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영어 읽기의 관점에서 수능 영어 자체를 돌아볼 필요는 있을 듯합니다.
현재 출제되고 있는 시험을 기준으로 하면 수능 영어는 100점 만점의 선택형 듣기, 읽기 문항이 총 45개 출제됩니다. 듣기는 17문항으로 보통 글이나 담화를 듣고 중심내용이나 세부정보, 대화자의 관계, 마지막 말의 응답을 묻는 문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읽기는 문항 하나당 보통 190자에서 250자 사이의 지문을 읽고 주제나 제목, 세부정보, 빈칸 추론, 글의 순서, 문법 등을 묻는 28문항으로 출제됩니다. 마지막 몇 문제를 제외하고 모든 읽기 문항은 지문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대략적으로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어휘 수는 5,000자가 넘어갑니다. 분당 약 111 단어를 읽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특히 수능 영어의 읽기 문항에 관한 비판과 옹호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지문을 비판하는 쪽에서는 영어 원어민 화자도 이해하기 어려워 틀리는 지문을 가져다가 그만큼 배배 꼬은 선택지를 들이밀며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추론하고 답을 찾으라 요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능 영어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대학을 진학하여 ’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졌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으로써 철학, 인문학, 자연과학 등 질 좋은 지문을 읽고 논리적으로 정답을 추론해 낼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두 주장 다 충분한 근거가 있고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의 입장에 동조하는 쪽입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수능 영어는 꽤나 불친절합니다. 수능에 나오는 지문은 충분히 길지 않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는 이가 맥락을 파악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보통 대학이나 대학원 수준의 전공서적에서 발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그 분야를 전공하고 충분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읽는 글이란 뜻입니다. 또한 원전 자체는 훨씬 길어서 맥락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합니다. 그러므로 수능 영어 지문을 읽는 행위는 대학에서 원서를 읽는 경험과는 많이 다릅니다. 더불어, 간혹 우리들도 아주 어렵거나 좋지 않은 글을 읽을 때도 있겠지만, 아직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이에게 이렇게 불친절한 글을 빠르게 읽고 문제를 풀라고 하는 건 상당히 가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 것과 연결됩니다. 대학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읽기는 수능 영어에서처럼 굉장한 추론을 요하는 일이 아닙니다. 수능 영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다는 주장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죠. 수능 지문은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에 관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최소한의 정보를 바탕으로 본인의 논리적 사고만을 의지해 정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대학에서의 영어 읽기는 이 정도 수준을 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공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학부 1~2학년 수준에서는 적당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세부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줄거리나 중요 사항을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는 정도의 읽기 능력이면 적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덧붙이거나 여러 텍스트를 읽고 종합하는 능력을 가지는 정도는 탁월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를 영어로 쓸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특급입니다. 그러나 수능 영어의 어떤 문항들은 최소한의 정보와 이상야릇한 구문을 가진 지문을 가지고 추론에 추론을 제곱한 정도를 요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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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수준의 영어 읽기를 하기에 우리나라 공교육 내에서 학습 시간은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사교육을 꼭 받으라는 메시지인 걸까요?
세 번째로 수능 영어 읽기 중 빈칸 추론이나 순서 맞추기 유형은 자연스러운 형태의 읽기가 아닙니다. 소위 몇 년 전까지 킬러문항이라고 일컬어지던 빈칸 추론 문항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통 글을 읽을 때 중간에 쥐가 파 먹어 빈칸이 있는 글을 읽지 않습니다. 순서가 뒤바뀐 문장을 재배열하지도 않습니다. 일관성 있는 글이란 크게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데, 내용이 논리적이고 유기적으로 흘러야 하고(coherence), 실제 쓰인 표현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cohesion).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가며 이러한 논리성을 따라가야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위에서 언급한 유형들은 어쩌면 읽기의 이런 특성을 무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수능 영어를 옹호하는 분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으나 제가 볼 때 현재 수능 영어 문제가 유지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선택형 문항이 평가로서 가장 간편하고 안전하다는 점입니다. 출제 자체가 편하진 않습니다. 좋은 지문을 선정하고 유형을 선택한 후에 매력적인 오답도 만들면서 문제에 오류나 시비를 걸만한 점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효율적으로 채점하고 변별할 수 있으며 공정성의 논란이 가장 적을 수 있습니다. 즉, 순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대입제도와 사회적 인식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안전하며 편리한 형태입니다. 과거에 영어 말하기와 쓰기 평가를 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물론, 정치적, 행정적 문제가 NEAT의 개발, 사후처리 단계에 있었으나 그건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입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고 묻는다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입제도를 개편하고 공정성과 변별력의 울부짖음을 극복하지 않는 한 별다른 대안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지필시험 형태의 영어 평가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목표설정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영어로 된 글을 읽으며 충분한 맥락 속에서 전공의 기초가 될 만한 정도의 지식을 적절히 이해하고 요약할 수 있는지 정도를 평가하는 시험, 엄청난 논리력과 추리력을 요하지 않는 시험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