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st esse seele auf
떼가 늘었다. 언젠가부터 “아니야.”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기저귀 갈자고 하면 “아니야.” 치카치카를 하자고 하면 “아니야.” 워워퉤를 하자고 해도 “아니야.” 나의 설득은 결코 먹히지 않는다. 자비도 없다. 아빠가 어깻죽지가 아파 누워 있겠다고 해도 일어나서 자신을 머리 위까지 올려 달라 한다. 천장에 손을 닿으려고. 엄마가 미친 듯이 졸려도 앉아서 자신을 안으라 잠투정한다. 앉아서 잠들려고. 요즘에는 심지어 이유도 댄다. 밥을 먹으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영상통화를 할 때, 할아버지께서 노래 불러보라고 요청하시면 자기 입을 손으로 가리킨다. 입에 밥을 물고 있어서 노래를 못 한다는 뜻이다. 어떨 땐 직접 “입에 밥이 있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가장 무서울(?) 때는 생떼를 쓸 때다. 얼굴을 최대한 찡그리고 눈물을 짜낸다. 때로는 울음도 짜내는 듯하다. 최장 30분은 그렇게 울 때도 있다. 아이가 생떼 쓸 때 요구를 들어주면 더 심해진다는 얘기를 들어 우리는 되도록 무시하려 노력한다. 힘들다. 억지로 으앙 울어버리면 귀엽기도 하지만 안쓰럽고, 때로는 귀도 아프다. 이 마저도 내가 화나 있으면 이뻐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의 관심을 돌리거나 아이가 스스로 진정하거나 하면 우리는 겨우 숨을 돌린다.
나중에 보니 어린이집에서 배운 듯했다. 단지 내 놀이터에서 마주친 어린이집 친구들 역시 그들의 부모에게 “아니야.”를 시시때때로 시전하고 있었다. 우리 애보다 2개월 빠른 딸을 키우는 수학 교사인 친구 역시 하소연한다. 아이 양치질을 시키려 30분을 기다렸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2개월 지나도 그대로야 라며 웃으며 경고했다. 그래도 그 부부는 나보다 훨씬 인내심이 있어 보였다. 초3, 초1 아들 둘을 키우는 또 다른 친구는 생떼를 부릴 이때가 좋은 거라며 나를 다독인다. 5-6살쯤 되면 이제 좀 나아지고 9살 쯤되면 말도 안 되는 떼를 쓰지는 않지만 그만큼 살가운 맛이 떨어져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면서.
언어가 발달하면서 본인의 의사표현이 다양해지고 소통의 양과 질이 풍성해졌다. 그러나 사고와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의 발달은 언어 발달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의 긴 설명도 아직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생떼를 부린다. 인간의 인지, 신체, 감정의 여러 갈래는 다른 발달 속도와 단계를 거치는 듯하다. 아마 그래서 아이도 혼란스럽고 힘들 것이다. 자신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는 상황, 부모의 짜증이나 단호한 모습, 이해 못 할 것들 투성이인 세상에서 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중학생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그 무시무시한 중2병에 미쳐간다는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담임이다. 다행히 지금 담임반 아이들은 그나마 순하다.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이유는 청소년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 급격한 감정변화와 또래의 영향에 크게 흔들리는 자아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역시 발달, 특히 뇌 발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언어의 발달과 사고나 감정의 발달이 뇌 속에서 각기 다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지도를 할 때는 네, 네, 잘 대답하다 뒤돌아서면 나아진 점을 찾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태는 아이의 생떼와 다르지 않다.
아아. 거울을 보자. 그럼 성인인 우리는 완전히 균형 잡힌 뇌 발달로 인해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생각한 대로 말하지 못하고, 계획한 대로 행동하지 못한다. 올바른 게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는 많지 않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삶을 위해 바른 자세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올바른 식습관을 가지며, 꾸준히 운동을 하면 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꾸준히 실천하여 정말로 평생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이의 생떼를 좋은 방향으로 훈육하고 성장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그러나 단호하게 훈육하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거다.
많은 연구들에서 드러난 사실은 인간은 감정이 이성을 앞선다는 사실이다. 또한 개인의 취향은 감각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과 가깝고 유기적으로 관계하여 감정이 냄새나 모습의 선호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은 합리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스탠스를 선택하거나 취향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발달된 이성은 자신이 끌리는 본능적 취향, 감정 이후에 그것에 대한 사후뒤처리, 즉 적당한 근거를 만드는데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욱 많다. 왜 이 야구팀이 좋아? 모두가 이런 이런 이유와 근거를 들며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선은 그 야구팀에 끌렸고 이유와 근거는 그다음이다. 이성이 더 발달한 사람일수록 더 설득력 있는 근거를 들고 더 잘 변명한다.
아래 테드톡은 쉽게 미루는 자(procrastinator)의 마음에 관한 것 있다. 강연자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은 감정, 취향 같은 본능적인 부분을 즉각적인 만족 원숭이(Instant Gratification Monkey)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이성을 합리적인 결정자(Rational Decision-Maker)로 비유하였다. 물론 그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쉽게 미루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여 묘사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두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얼마나 잘 미루고 안 미루냐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TED TALK: 쉽게 미루는 자들의 마음
이 영상에서처럼 성인인 우리도 생떼를 쓰는 아이나 질풍노도의 중2 학생들처럼 즉각적인 만족을 쫓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존재일 뿐이다. 40여 년을 살아온 보통의 성인인 나도 그럴진대 아직 태어난 지 30개월 밖에 안된 아이는 오죽할까.
그러나 부모로서 나는 내 한마디 말, 내 행동 하나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걱정을 안고 살아간다. 이는 본능에서 오는 것도 있겠으나 칠 할은 육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에서 오지 않을까. 36개월 이전엔 훈육하지 말라는 전문가도 있고, 오은영 박사 같이 아이의 감정을 읽고 받아주는 걸 강요하는 전문가도 있다. 더 어릴 때에는 스테로이드 연고 쓰는 것에 대해 주의, 이유식과 어린이 식을 먹일 때 편식이나 식사 예절에 대한 훈육, 디지털 기기나 미디어의 노출 등등 끝도 없는 주의 사항들이 있었다. 아.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유치원 때까지는 그렇게 성격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성격 형성은 뒷전으로 밀어내 버리고 그 자리에 잘 공부시키는 법, 학습방법 같은 걸 가져온다.
힘들다. 아이가 응가가 마렵다고 하여 바지와 기저귀를 벗겨 화장실 변기로 데려가면 응가는 않고 두루마리 휴지를 가지고 놀고나 앉아 있는 변기를 만지고 그 손을 얼굴로 가져간다. 엄마가 물티슈로 음식을 흘린 바닥을 닦으면 본인도 꼭 물티슈를 받아내려 줄 때까지 “물티슈, 물티슈!“라고 외친다. 밥은 먹겠다고 말하면서도 밥은 먹지고 않고 물컵의 물을 밥그릇에 붓거나 바닥에 밥을 일부러 흘린다. 이런 일들을 제지하면 생떼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때로는 큰소리로 ”안돼“를 외치고,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이러면 아이한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TED TALK: 부모가 자녀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
그래도 위 영상에서의 주장을 좀 더 신뢰하며 불안을 거두려 노력한다. ”부모의 선택에 의해 아이가 어떻게 자랄지 예측하는 것은 나비의 날갯짓을 통해 허리케인을 예측하려 노력하는 것과 같다(Trying to predict how child will turn out based on choicesmade by the parents is like trying to predict a hurricane from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부모는 아이의 우주라고 말들 하지만 사실 부모의 행동과 말은 아이의 성장에 끼치는 수많은 변수 중 하나일 뿐이다. 너무 하찮게 여겨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매달리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다. 열심히 참고 육아하되 내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의 성격형성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지 말자.
본 적은 없지만 이런 독일어 제목의 영화가 있다고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 seele auf).
아이는 알아서 잘 크고 있다. 그냥 이때 우리 아이가 보여주는 귀여움을 소중히 여기자. 둘째를 낳지 않는다면 다시 못 보는 귀한 모습들이다. 절. 대. 둘째를 낳을 생각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