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일본 영화들을 많이 찾던 시절이 있었다.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무지개 여신>, <웰컴백미스터맥도널드>, <지금 만나러 갑니다>, <하나와 엘리스>, <셸 위댄스>, <서머타임머신 블루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밤의 피크닉>, <피시스토리>,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백만 엔과 고충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태양의 노래>, <냉정과 열정사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어느 가족>, <스윙걸즈>, <워터보이즈>, <69>, <서바이벌 패밀리> 등등. 로맨스도 보고, 드라마와 코미디 같은 장르도 찾아보았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아기자기한 이국적인 풍경이라던가, 인물의 얼굴만을 비추지 않고 배경 속에 인물을 작게 담는 정적인 장면, 큰 사건 없이 작은 일을 소중하게 담아내는 담백한 스토리 등에 빠졌던 것 같다. 특히 소박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이 마음에 들어 따로 찾아 듣기도 하였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 영화처럼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이를테면 슬픔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중에서도 단연코 <러브레터>를 가장 많이 보았다. 일본 문화 수입이 시작된 초기에 <하나비>와 함께 입소문을 타 이슈가 되었다는데, 그때는 알지 못했다. 2000년 대 들어 처음 영화를 접한 후 끝없이 빠져들었다. CD로 산 OST는 너무나도 자주 듣다 보니 여기저기 기스가 생겨, 소장용으로 하나 더 구매한 것은 지금도 책장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소설을 발견했을 때, 깜짝 놀라 바로 구매하기도 하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후지이 이츠키(여)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겉옷에 주머니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해 손을 어디에 둘지 모른다 묘사를 하며 마무리한다. 이 또한 따뜻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OST 첫 번째 트랙인 ’His Smile‘의 묵직하고 뿌연 피아노 울림으로 시작하는 영화 첫 장면에서 와타나베 히로코는 조난 당해 죽은 자신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남)를 추억하고자 눈밭에 누워 숨을 참는다. 몸을 에워싼 눈과 하늘에서 내리며 무게 없이 얼굴에 앉는 눈은 차가웠을 테지만 눈을 감은 그녀가 그린 그의 미소는 배경음악처럼 따뜻했음에 틀림없다. 사무친 그리움으로 히로코는 이츠키(남)의 졸업앨범 뒤편에 적힌 그의 예전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하필 고교시절 그의 반에 동명이인인 여학생 후지이 이츠키(여)가 있었고, 히로코가 쓴 편지는 그녀에게 배달된다. 이츠키(여)는 답장을 하였고 히로코는 받을 수 없는 답장을 받게 되어 크게 놀란다.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 보낸 편지는 그렇게 두 여자를 연결해 주었고 이츠키(여)는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조용하지만 독특한 남자애와의 고교시절 추억을 히로코에게 전한다. 영화는 하얀 홋카이도의 겨울 풍경과 아련한 노란빛을 띤 두 이츠키의 학교 생활을 교차하며 비춘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투명한 피아노 소리는 결국 히로코와 이츠키(여)를 수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스치게 한다. 이츠키(남)의 사랑이 이츠키(여)였음을 깨달은 히로코는 자신이 받은 편지를 다시 이츠키(여)에게 되돌려 준다. 자신이 쓴 편지를 전부 받은 이츠키는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어쩔 줄 몰라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두 후지이 이츠키를 연결해 주는 매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아무도 빌리지 않는 책을 대여하여 책 뒤편 대여장에 ‘후지이 이츠키’라고 기록하는 이츠키(남)의 별난 취미에 이츠키(여)는 코웃음을 친다. 졸업하기 전 마지막 방학 때, 이사를 가게 된 이츠키(남)는 반납하지 않았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츠키(여)에게 건넨다. 개학 후 그녀는 그 책을 도서관 책장 원래 자리에 꽂는다. 수십 년이 지나 히로코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돌려받은 이츠키(여)는 현재 모교의 도서부원으로부터 받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뒤편 대여장에 적혀 있던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과 그 뒷면에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결국 이 영화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그리움으로 시작하여 후지이 이츠키(여)의 그리움으로 끝난다-히로코와 이츠키(여)는 나카야마 미호라는 한 배우가 연기했다-. 나는 이 영화가 로맨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히로코가 이츠키(여)의 편지를 모두 모아 되돌려 보내며 언급했던 것처럼, 두 후지이 이츠키가 주고받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목처럼. 이 영화는 <러브레터>를 쓰며 잊었던 추억을 되돌아보는 글쓰기 같은 영화다.
언어는 근원적으로 시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 지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글자, 한 단어씩 이 글을 타이핑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간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그래서, 과거로부터 시작해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흘러간다. 재미있는 연구가 있는데, 피실험자에게 어떤 공간, 예를 들어 자신의 방을 묘사하라고 할 때, 시간의 단선적인 흐름으로 3차원의 공간을 묘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선 문이 있고 그다음 바로 옆에는 거울이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른쪽으로 이동히면 책상이 있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한다. 더 신기한 것은 만약 방 중간에 있는 문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빙 둘러 묘사하는 경우에 공간적으로는 문의 왼쪽에 가까이 붙어 있는 물체, 예를 들어 화분이 묘사하는 말속에서는 문과 가장 떨어져 있게 된다. 실제 실험용 문장을 사람들에게 읽힐 때,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물체라고 하더라도 문장 사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눈의 움직임이라던가 문장을 읽는 속도에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한다고 한다.
인간이 중력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언어로 쓰거나 말할 수밖에 없다. <러브레터> 역시 결국 주인공 후지이 이츠키(여)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히로코에게 썼던 추억담은 결국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였던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이나 슬픔이 담긴 시간, 미래의 기대와 우려를 그리는 시간, 또는 고군분투하는 현재를 묘사하는 시간을 글쓰기에 담는다. 그리고 타인의 글을 읽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을 공유하고 느끼는 일이다. 그러나 결국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에 대한 글/언어 속에는 글쓴이의 감정과 생각의 편린 만을 담을 수밖에 없다. 이츠키(여)는 고교 시절 내내 이츠키(남)와의 부딪히면서도, 나중에 그에 대한 추억을 글로 남기면서도 그게 사랑이란 감정인지 깨닫지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자신을 그린 그림을 보며 겨우 알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소재로 등장하는 또 다른 영화가 한 편 있다. 어린이 미인 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어린 딸을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로드 무바인 <리틀 미스 선샤인>이다. 그 영화의 한 장면에서 삼촌 프랭크는 조카 드웨인에게 고통스러웠던 순간의 귀중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위로한다. 마치 글쓰기가 주는 위로 같다. 과거 기억 속 순간들을 돌아보며 현재의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7VbYokM9dY4
드웨인: 가끔 18살이 될 때까지 잠들고 싶어요. 고등학교 같은 쓰레기 같은 것들을 다 건너뛰고 싶어요.
Dwayne: Sometimes I just wish I could go to sleep till I was 18. I’ll skip all this crap, high school and everything, just skip it.
프랭크: 마르셀 프루스트라고 아니?
Frank: You know Marcel Proust.
드웨인: 삼촌이 연구하는 그 사람이죠.
Dwayne: He’s the guy you teach.
프랭크: 맞아. 프랑스 작가이고, 완전한 패배자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적도 없고, 짝사랑에, 게이에, 20년 동안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썼지. 하지만 아마도 분명히 셰익스피어 이후 가장 훌륭한 작가일 거야.
어쨌든, 그가 죽기 전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니, 고통스러웠던 모든 순간들이 그의 삶에서 최고의 순간들이란 것을 알았어. 왜냐하면 그런 순간들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거든. 행복했던 순간들? 너도 알다시피 완전 쓰레기야,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
그러니까 만약에 네가 18살까지 잠든다면, 어우, 네가 놓칠 그 고통을 생각해 보렴. 고등학교? 최고의 고통스러운 시간들 아니겠니? 더 한 고통은 없을 거 같구나.
Frank: Yeah. French writer, total loser, never had a real job, unrequited love affair, gay, spent 20 years writing a book almost no one reads. But he’s also probably the greatest writer since Shakespeare.
Anyway he gets down to the end of his life, he looks back and decides that all those years he suffered, those were the best years of his life, cause they made him who he was. All the years he’s happy? You know, total waste, didn’t learn anything.
So if you sleep until you’re 18, ah, think of the suffering you’re gonna miss. I mean, high school, high school, those are your prime suffering years. I don’t get better suffering than that.
드웨인: 삼촌, 그거 아세요? 미인 대회 엿이나 먹으라고 해요. 인생은 엿같은 미인 대회의 연속이에요. 학교, 대학교, 그리고 일. 엿이나 까잡수라고 해요. 그리고 공군 사관학교도 엿 같아요. 파일럿이 되고 싶은 다른 방법을 찾을 거예요. 사랑하는 걸 해야죠. 나머지는 엿 먹으라고 하고요.
Dwayne: You know what? Fuck beauty contest. Life is one fucking beauty contest after another. You know, school, then college, then work. Fuck that. And fuck the airforce academy. If I want to fly I’ll find a way to fly. You do what you love. And fuck the rest.
덧.
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지 못했다. 시도는 했는데 실패했다. 너무 재미없었고 어려워서 한두 장 읽고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