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에 입소할 때 사람들의 차림새는 각양각색이다. 편한 옷을 입고 온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브랜드부터 옷의 색상 스타일까지 모두 다르다. 나는 상의부터 신발까지 당장 버려도 큰 타격이 없을 만큼 낡은 차림으로 입고 입소했다. 2년 전만 해도 푹신했던 신발 밑창은 다 눌려서 딱딱했다. 가족들과 함께 있다가 왔기 때문에 굳이 마지막 모습을 멋지게 남기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입영 심사대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어느 정도 신경 쓴 옷차림으로 입소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전날 밤새도록 놀다가 그대로 왔거나 당일에 찾아온 친구들, 여자 친구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 같았다. 환호성 속에 입대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높은 확률로 꾸민 티가 났다.
하지만 무슨 옷을 입고 입소했든, 하루가 지나면 모두 같은 옷, 심지어 속옷까지 똑같이 입고 생활하게 된다. 입고 온 옷은 고이 접어서 보관하다가 조교가 나눠주는 상자에 담아야 했다. 이 상자는 각자 집에 돌려보내는 소포 상자로 장정 소포라고 부른다. 이름을 참 잘 지었다. 장정이라고 하면 건강하고 기운 좋은 남자라는 뜻만 생각할 텐데, 장정은 군역이나 부역에 소집된 남자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이름을 만든 사람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았다는 기쁨에 무릎을 탁 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장정 소포에는 입고 온 옷 외에도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함께 담았다. 훈련소에서 보내는 편지는 생각보다 늦게 전달되기 때문에 소포가 더 빨리 도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장정 소포 상자를 수거해 간다는 말에 다들 시간 날 때마다 편지 쓰기에 바빴다. 나는 주말 동안 이미 편지를 다 써 두었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상자 속에 든 옷을 괜히 단정하게 정리하며 옷자락을 매만졌다. 상의는 목과 팔꿈치가 다 늘어나고, 하의는 무릎이 튀어나와 오래된 옷이 가진 추레한 특징은 다 갖추고 있었다. 상의의 팔이 몸통에 스치는 부분에 일어난 보풀까지 완벽한 조화였다. 이건 빈티지도 아니고 그냥 버려야 할 낡은 옷이다 싶어 혼자 웃으며 이 옷들이 내 허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모습이 마치 오랫동안 몸에 달라붙어 역할을 다해온 외피를 벗어던진 애벌레 같았다.
곤충의 성장과정은 탈피와 변태로 이루어진다. 애벌레는 성충으로 변태 하기 전까지 여러 번의 탈피를 한다. 탈피나 변태나 둘 다 껍질을 남기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지만, 전혀 다른 모양의 성충이 되는 변태와 달리 탈피는 애벌레가 몸집을 키우기 위해 외피를 벗는 과정이라 형체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교 때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를 키우던 친구로부터 애벌레가 여러 번 탈피한다는 것을 배웠다. 애벌레가 열심히 옷을 벗고 다시 애벌레가 된다. 여러 번에 걸쳐 발전한 애벌레가 되는 과정을 ‘령’이라는 말로 구분하여 ‘2령 애벌레’, 3령 애벌레’와 같이 부른다.
갑자기 얕은 지식을 뽐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이 생각이 난 것은 내가 벗어놓은 옷들이 변태에 의한 허물이라기보다 탈피에 의한 허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헷갈릴 일도 없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덩그러니 옷만 벗어 놓았으니 말이다. 애벌레는 탈피 직후 가장 연약한 몸을 가진다. 상처 입기 쉬운 몸으로 새로운 키틴질의 피부를 덧입기까지 버텨야 한다. 나 역시 사회의 흔적이 묻어있는 옷을 벗고 가장 연약한 몸이 되었다. 이곳에서 내가 뭘 하다 온 사람인지 말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나는 타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탈피를 하는 중이었다.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입고 온 옷을 벗어 차분히 정리하는 훈련병들의 주저하는 손길이 눈에 띄었다. 멋지게 차려입고 온 친구들의 옷도 이제 곧 상자에 들어가 한동안 잊힐 것이다. 편한 옷을 입고 왔다지만 나 역시 나의 성격과 판단이 개입한 옷차림을 하고 온 것이었으니,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새로운 환경에 던져지는 때마다 나는 연약해진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주어진 자리에 적응하며 만들어온 것들을 무너뜨려야 하는 시기는 때마다 찾아왔다. 환경의 변화에 의한 타의였지만 언젠가는 자의로 버려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벗어나도 조금 더 큰 도랑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매 순간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는데 매 순간 허물이 남는다. 내가 믿고 기대던 것들을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아쉽고 슬펐다. 옛 기억들과 함께 상자를 밀봉하는 동안, 그날의 기분은 건조한 골판지가 살을 스치듯 쓸쓸하게 마무리되었다.
이 생각을 긍정적으로 마무리지어 준 것은 한참 뒤 군생활을 하던 도중 만난 시였다. 나는 시를 읽으며 다시 그때를 떠올렸다. 유지소 시인의 시집 『제4번 방』(천년의 시작, 2006)에 수록된 시 <나비>였다. 시는 나비의 성장 과정을 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허물, 흉을 대하는 삶에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래는 시 5번째 연이다. 나에게 위로를 선사한 구절이다.
애벌레는 허물의 힘으로 자란다 허물을 벗는 힘으로 자란다 아니 허물을 먹는 힘으로 자란다 갓 태어난 애벌레의 맨 처음 식사는 자기가 방금 벗어놓은 그 허물 그래서 애들은 허물이 많아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시인은 허물을 만들고 허물을 벗고 또 먹지 않기 때문에 나비는 성장을 멈춘다고 말한다. 그게 사람들이 부르는 어른의 모습이라고 꼬집는다. 시에서는 허물과 흉을 같이 말하며 미성숙함의 흔적으로서의 허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만 허물은 새로운 시도, 도전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다. 시도와 도전의 결과로 변화할 때 비로소 자기 허물을 볼 수 있게 된다. 허물은 버리고 온 나의 모습이 아니라 자서전 속 하나의 이야기처럼 나를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허물을 먹는 것은 과거를 긍정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갈수록 세분화되어 가끔은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나의 굵은 줄기, 나의 옛 몸을 체화하는 것이다. 허물을 만들고, 직시하고 체화하는 과정이 나를 자라나게 한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벗어놓고 보니 허물인 것들이 자꾸 눈에 띈다. 마주하기 싫지만 조금은 더 강해진 턱으로 와작와작 씹어 삼켜야 자라날 수 있다.
시를 미리 알아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이게 제 허물입니다. 나의 허물을 보냅니다. 애벌레는 허물을 만들고 벗고 먹는 힘으로 자라납니다.”라고 썼다면 멋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말았다. 사람이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더 걱정되는 법이다. 우리 삶은 서서히, 조금씩, 어쩌면 영원히 탈피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비가 되는 것은 어느 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