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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오 Jul 20. 2022

여름 한복판의 기린

잃어버린 계곡에는 기린이 살아요

잃어버린 것이 계곡인지

잃어버린 것들이 계곡에 모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일단은 반가운 우리의 기린 친구들


고개를 숙이며 다가오는 기린의 눈동자

여름의 파르란 하늘과 아찔하게 밝은 태양과

지겨운 초록이 깊이 박힌 기린의 눈동자

나도 둥글게 풍경의 일부가 되어갈 때


긴장한 나는 침을 꿀꺽 삼켰어요

선명해지는 소음들 여기는 높거나 낮은가 봐요

기린은 인사하고 고개를 들 때마다 침을 삼킬까

먹먹하고 선명한 선명하고 먹먹한 기린


풀밖에 먹지 않는 검고 두꺼운 혀

거짓말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혀 위에

잎이 넓은 풀 하나를 얹어주면

우물대는 입 쩝쩝대는 소리 이건 기린의 노래일 거야

자장가처럼 감미롭고 찬송가처럼 경건한


잃어버린 계곡에는 알파카 알파카 얼룩말 코끼리 기린

기린 기린 기린 다들 착해 빠졌어

푸르르 입술을 털며 서로를 배고 잠에 들었네

나는 달콤한 잠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져요


뻔한 슬픔을 하루씩 뒤로 미루듯

긴 다리를 뻗어 떠나가는 기린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느라

기린이 되어버린 기분

사람의 심장을 가졌는데 길어진 목 때문에

나는 두통을 달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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