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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디푸스 Jul 19. 2019

그 날 우리는 모두 죽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달쯤 전의 일이다.  근무 시간에 소화전에서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하던 일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마치 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전화벨이 울렸을 때의 반응과 비슷하다. " 대피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주변 동료들에게 물어봤지만 "혼자 대피하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헛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표정이다. 일하기 싫어서 핑계나 찾는 사람 취급이다.  화재 경보음에 반응을 보인 몇몇 사람이 있다. 그들은 경보가 울리자마자 소화전으로 가서 경보를 끄기 위해 노력한다. 잠시 후 화재 경보는 멈춘다. 그렇게 30분쯤 지났을까 화재경보기가 또 울렸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아까와 같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울렸다. 역시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다. 난 그냥 조용히 화장실도 갔다가 자판기에서 음료수도 뽑아 먹으러 가고 하면서 사무실을 잠시 벗어나 본다. 그리고 다행히(?) 회사에 불이 난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의 판단이 맞았고 나는 별일도 아닌 일에 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날 우리는 모두 죽었다.



  한 오 년 전쯤 일이다. 주말 아침이었다. 늦게까지 자고 있었는데 화재 경보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오피스텔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난 망설임 없이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서 1층으로 대피했다. 부스스한 머리로 주변을 살피니 나처럼 대피한 인원이 4~5명 정도였다. 오피스텔 건물 규모로 봤을 때 너무 적은 인원이었다. 물론 주말이라 아침 일찍 어디 놀러 가고 건물 안에 없었을 수도 있지만 건물 안에 꽤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건물 관리자 분께 화재경보 오작동임을 확인받고 집으로 올라갔다. 

그 날 나는 살았다.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 중 제1부 상황의 힘을 보면 재미난 실험이 나온다. 한 방에 여러 명에게 10분 동안 시험문제를 풀라고 하고 감독관은 밖으로 나간다. 시험문제를 풀고 있는 동안 방안에 정체모를 연기가 들어온다. 여러 명의 사람 중 한 명만 실험 대상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 실험을 위해 섭외된 실험 도우미들이다. 실험 대상자가 연기의 존재를 인식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하는 동안 도우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시험문제 푸는데만 집중한다. 이때 실험 대상자는 다른 도우미들과 함께 계속해서 시험 문제를 풀고 10분이 지나간다. 이 실험을 네 번 반복했는데 모든 실험 대상자들도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두 번째 실험은 방안에 실험 대상자 한 명만 있게 한 후 10분간 시험문제를 풀게 한다. 방안으로 연기가 들어오자 잠깐 동안 상황판단을 한 후 문제 풀기를 그만두고 방 밖으로 나온다. 이것이 실제 불이 난 상황이었으면 첫 번째 실험의 대상자들은 모두 죽고(부상을 입고 살 수도 있지만) 두 번째 실험 대상자는 살았다(방을 빠져나왔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두 가지의 실험은 위에서 언급한 한 달 전쯤 사무실에서의 나와 오 년 전쯤의 오피스텔에서의 나와 상황이 비슷하다. 고려대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는 "연기가 들어오는 정보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상황을 판단하는 데 다른 사람의 행동이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실험 영상을 보고 싶으신 분들은 하기에 링크를 걸어놨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KE7p0_Y0Bs

EBS 다큐프라임_인간의 두 얼굴_제1부, 상황의 힘

  허태균 교수의 "연기가 들어오는 정보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상황을 판단하는 데 다른 사람의 행동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 적용되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군인들이 누가 보더라도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나간다고 하자. 병사들 눈엔 전쟁에 나가면 전멸할 것이 뻔해 보인다. 하지만 장군 및 지휘관들의 말과 행동이 평소와 같이 평안하고 자신감이 넘치면 병사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생각은 바뀌게 된다. 그리곤 전투에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지휘관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병사들은 탈영을 하기도 하고 전투에 나가기도 전에 패배하고 만다. 이러한 사례들은 역사나 영화 속에서 심심찮게 나온다. 

  직장 내에서도 회사에 만족하고 다니고 있더라도 주변 동료들이 모두 회사 불평을 늘어놓으면 회사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반대로 회사의 불평이 많았는데 동료들이 회사를 만족하고 다니면 본인도 회사에 대해서 만족하며 다닐 수도 있다. 

  포커 게임을 할 때도 내 패가 아무리 좋아도 상대방이 자신감 있게 덤벼들면 카드를 내려놓기도 하고 패가 별로 좋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 끝까지 배팅하기도 한다. 자신의 패에 대한 정보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도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더 큰 영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 

  만나는 친구들도 중요하다. 친구들 모두가 취업을 못하고 있고 별다른 위기감을 못 느끼고 있다면 자신도 취업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위기감을 못 느낄 수도 있다. 반면에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어도 친구들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노후 대비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평소 만족하며 지내다가도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 대구광역시 중구 남일동의 중앙로역 구내에서 50대 남자가 휘발유를 담은 페트병 2개에 불을 붙인 뒤 바닥에 던져 총 12량의 지하철 객차를 뼈대만 남긴 채 모두 태워버린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大邱地下鐵火災慘事]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22586&cid=40942&categoryId=31778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나도 내 친구도 가족들도 이 참사에 관련된 사람은 없었지만 뉴스를 통해 전해지던 그때의 참상을 떠올려보면 너무나도 끔찍하다. 탈출하고자 했다면 탈출할 수도 있었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다.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면 지하철 안에 연기가 차오르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고 있는 모습니다. EBS 다큐프라임에서 진행한 실험과 비슷한 상황이다. 왜 빠져나오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지 묻고 싶지만 나였어도 그들과 같았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아무런 동요가 없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 이렇게 가만있을 수 있겠어? 이 많은 사람들이 모두 틀릴 수는 없을 거야.'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위의 실험에서와 같이 만약 지하철에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면 빠져나오지 않았을까?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당시 현장 사진

  다시 한 달 전쯤 우리 회사로 돌아와서, 그 날 화재 경보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상황을 판단하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당연히'오작동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회사에 안전관리 담당자는 있는데 관리 체계가 없다. 오작동이었으면 오작동 원인을 파악하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런 조치도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화재 대피 훈련도 받아보지 못했다. 화재 경보가 울리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교육받지 못했다. 정말 화재가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화재가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동료 중 누군가 말했다. 그 정도 화재였으면 이미 연기도 나고 화재를 감지하고 화재경보가 안 울렸어도 사람들이 피했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불이 나도 다른 사람 눈치 보고 '누군가 불을 끄겠지, 누군가 대피하라고 하겠지, 대피하라고 하면 그때 대피해도 늦지 않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허태균 교수의 말을 빌려 말해주고 싶다. "결코 밖에서 봤을 때 '나라면 안 그럴 텐데'라는 생각 자체가 굉장히 오만한 생각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상황에 들어가면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제일 위험한 거죠. 그게 상황의 힘의 무서움입니다. " 

  우리에겐 상황 훈련이 필요하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자료:
EBS 다큐프라임_인간의 두 얼굴_제1부, 상황의 힘
[네이버 지식백과]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大邱地下鐵火災慘事]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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