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당신이 컵라면을 사 먹는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시오
'연차 사유를 상세히 적으시오'
우리 회사에서 연차를 계획하고 결재를 받기 위해서 그룹웨어에 들어가면 나타나는 문구다. 많은 회사들이 직원들이 연차를 사용할 때 상세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나는 항상 '개인 사유'라고 적고 끝낸다. 그 이상 자세하게 적고 싶지도 않다. 나에게 사용할 수 있는 연차가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편의점에 가서 돈을 내고 컵라면을 사 먹을 때 컵라면을 사 먹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돈을 지불하고 사 먹듯 연차를 사용할 때도 나에게 주어진 연차를 사용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연차 사유를 어떻게 적고 있는지, 얼마나 상세하게 적고 있는지 궁금해서 '결재 완료함'에 가서 지금까지 상신된 내용들을 살펴봤다. '개인 사유'만 적힌 것들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상세하게 적힌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와이프와 함께 초음파 진단을 위한 산부인과 진료'
' 지난주 예약된 치과 진료를 받지 못해서 재예약 방문'
'여권 갱신 및 은행 업무'
이것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연차 하나 쓰기를 뭘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적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적고 싶어서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일 것이다.
직장을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번은 연차 사용 2주 전에 연차를 올렸는데 계속해서 결재가 안 나다가 2주가 다 지나갈 때쯤 돼서 내 자리로 팀장님한테 전화가 와서 "연차 사유를 개인 사유라고 적었는데 뭐할 거니?"라고 물어보길래 놀러 간다고 했더니 누구랑 어디 가는지를 물어본다. 별로 대답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물어보니 여자 친구랑 놀러 간다고 했더니 '가족여행'으로 변경해서 결재를 하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회사를 잘못 들어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사유'로는 연차를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인가? 가족여행 정도 돼야지만 연차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나는 항상 연차 올릴 때 '개인 사유'라고만 적고 끝낸다. '연차를 사용하면서 상세하게 이유를 밝히고 싶지는 않고 내가 연차 쓰고 뭐하는지 궁금하면 물어봐라. 알려는 드릴게.'라는 생각이다. 한 번은 물어보길래 "아무 계획은 없고 그냥 집에서 쉴 예정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연차를 사용하냐는 것이다. "연차는 잘 쓰지도 못해서 남아돌고 잠깐 업무가 줄어들었고 나는 지쳐서 좀 쉬고 싶은데 그러면 도대체 연차를 언제 쓰란 말인가요? 연차 안 쓴다고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연차 쓰는 게 뭐가 문젠 가요?"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인터넷에 '연차 사유'를 검색해보니 많은 직장인들이 연차 사유로 뭐라고 적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인에서 실시한 하기 설문조사를 보면 몸이 아프거나 집안일이 있다고 하는 것이 핑계대기도 쉽고 상사들에게 잘 먹힌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그래도 개인 건강이나 가족 일에 대한 연차 사용에 대해서 이해가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모 팀장님께서는 "부모님 돌아가시는 것 아니면 모두 출근해!"라고 까지 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