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는 언제 써야 하나요?
“본인에게 주어진 휴가를 다 쓰지 않고 휴가를 다녀오지 않은 것이 마치 더 일을 열심히 한 듯이 으스대는 선배들을 볼 때면 얼간이같이 느껴져요. 내 휴가를 내가 사용하는데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얼마 전에 팀장님이 지나가는 말로 ‘휴가가 너무 잦은 거 아닌가?’라고 하는데 기분이 안 좋았죠. 지적하려면 업무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90년생이 온다’ 중에서-
많은-많은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들도 많기 때문이다.- 회사들이 직원들에게 1년에 15일간의 유급휴가(연차)를 부여하고 근무 기간 2년 지날 때마다 1일의 유급 휴가를 추가로 부여한다. 직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휴가 일수 내에서 업무 스케줄 고려하여 자유롭게 연차를 사용한다. -원칙적으론 그렇다- 하지만 연차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팀장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팀원들이 연차를 사용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팀장들이 많다. 이런 팀장들의 유형을 내 경험에 비추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보통 아래의 유형 중 여러 가지를 같이 가지고 있다.
1. 연차가 뭔가요? 유형
본인 스스로 연차를 사용해본 적이 거의 없는 케이스다. 경험상 나이가 많을수록 이런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근속연수도 길기 때문에 보유 연차 일수도 최대 연차 일수인 25일인 경우가 많다. 연차 25일이면 산술적으로 1달에 2개 이상씩은 써야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연차 제도가 뭔지 모르나 싶을 정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현실과 다른 연차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연차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팀원들의 연차 사용이 이해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연차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은 연차에 대해서 회사에서 돈으로 지급해줬기 때문에 1월쯤에는 꽤 짭짤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출근해서 매년 연차수당을 받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회사에서 연차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연차 사용을 장려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회사도 있고 말로만 장려하는 척하는 회사도 있지만- 연차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없다.
2. 자기 위로 유형 (feat. 회사에 대한 충성심)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출근하는 것에 대해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연관시키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자기 위로를 받는다. 연차를 모두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도 없고 이기적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연차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드라마 속 비련의 주인공을 꿈꾸기도 한다. 누가 더 일이 많고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지, 누가 더 늦게까지 일을 하는지, 누가 더 휴가를 안 가는지를 이야기하고 거기에서 승리를 느끼기도 한다.
3. 배 아파 유형
팀원들의 연차를 승인해주는 위치에 있는 팀장들은 본인들의 연차를 임원들에게 승인받아야 한다. 임원으로 올라갈수록 연차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예전부터 직원들을 쥐어짜서 성과를 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이런 사람일수록 임원에 올라간 경우가 많다. 많은 연구 결과들이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법규도 바뀌고 비즈니스 환경도 바뀌고 있지만, 이들에겐 여전히 회사에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성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압박을 받고 눈치를 보느라 연차를 사용 못 하는 팀장들이 팀원들의 휴가를 배 아파하는 경우다. 더군다나 팀장들은 팀원들보다 연차일수도 많은 데 사용하지 못하니 더 억울할 수 있다. 나도 못 쓰는 거 너도 쓰지 말라는 유형이다.
4. 꼭두각시 유형 (feat. 상급자의 압박)
팀원들에 연차 사용에 대해서 태클 없이 자유롭게 보내줬더니 상급자로부터 압박이 들어오는 경우다. 팀장의 상급자가 ‘너희 팀 연차 사용이 왜 그리 많으냐, 팀원들을 관리해야 할 팀장이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건 맞느냐’가 압박을 주기도 한다. 업무상에 어떤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팀원들의 연차 사용과 연관 지어서 팀장에게 압박을 준다. 이렇게 압박을 받다 보면 팀장도 회사에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팀원들의 연차 사용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5. 독재자 유형
연차 사용에 대한 승인 권한을 내세워 팀원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유형이다. ‘ 너 이래서 연차 쓸 수 있겠어?, 이 일 끝내기 전에는 휴가 갈 생각 하지 마, 일을 이딴 식으로 해놓고 휴가 갈 생각만 하니?’ 등의 말을 서슴지 않게 하고 팀원이 휴가 결재를 올리면 휴가 직전까지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휴가 결재가 올라오면 일을 막 몰아서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면서 팀원들을 자기 뜻대로 하길 원한다.
6. 정치 유형
팀원들이 연차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야근을 시키기도 하고 - 일이 없을 때도 적용된다- 회사에 ‘우리 팀은 연차도 못 쓰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인원이 부족하니 충원해달라’ 등의 어필을 하기도 한다. 팀원들의 연차 사용 일수가 적은 팀장에게 페널티를 물려서 연차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회사들도 있지만, 아직까진 많은 회사가 직원들의 근무시간 많은 것을 좋아하고 야근을 많이 할수록 고과를 잘 주는 회사들이 많다. 이런 회사에서는 이러한 정치가 통하기도 한다.
7. 무능력 유형 (팀원 부재에 대한 불안감)
팀원이 휴가로 자리를 비웠을 때 대체할 인원이 없고 본인 또한 대체할 수 없는 경우다. 심지어 휴가 가기 전에 업무들을 깔끔히 정리하고 간다고 하더라도 혹시라도 발생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 대응할 자신이 없다. 팀원이 있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팀원의 부재 시 본인의 무능력이 드러날 수 있어서 걱정하는 유형이다.
8. 일이 너무 많아 유형
물리적으로 인원이 부족해서 일이 많은 회사가 있다. 잠깐 바쁜 것이 아니라 몇 달씩 계속 바쁘기도 한다. 이미 팀원 각자가 150%씩 일을 하는 상황에서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때 나머지 팀원들이 도저히 채울 수 없는 경우다. 게다가 일정 조율도 안되고 일정을 꼭 지켜야 하는 경우라면 누구 하나 빠질 수 없다. 회사의 쥐어짜기에 팀원들이 연차를 사용할 환경 자체가 되지 않는다.
9. 그냥 싫음
사회 분위기, 관련 법규, 회사 정책도 바뀌고 있고 팀원들의 마인드도 바뀌고 있지만 팀장 이상, 회사 내의 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 관련 법규 및 회사 정책도 무늬뿐인 경우가 많지만- 여기에서 혼란이 생긴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팀장이나 임원들에게 교육을 하지도 않는다. 정책은 만들어서 생색은 내고 실제로 실행되지 않는 상황에는 눈을 감는다. 그래도 느리지만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은 느낄 수 있다. 나의 경험과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가 우리나라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도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의 후배들, 다음 세대들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헛소리로 들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