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며 놀던 몽실이가 귀여운 강아지 눈을 하며 애교를 부린다. "안 된다"는 엄마의 대답을 이미 예상한 듯 눈꺼풀을 깜박이며 온갖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 우습다.
"친구들도 그런 거 학교에 가져오니?"
시무룩해진 몽실이, 고개를 절래절래.
그러다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반짝인다.
"00이요! 00이! 00이는 엄청 큰 거 가져왔어요!"
"엄청 큰 거?"
몽실이는 양팔을 옆으로 벌리며 대략의 크기를 알려준다.
"요~~~만한 거요! 엄청 커요!"
"그렇게 큰 것이 책상 위에 올라가기는 하니?"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
"나한테 없는 색도 정말 많은데! 내가 연핑크 빌려달라고 졸랐는데도 안 빌려줬어요. 엄마, 나도! 나도! 나도 48색 학교에 가져갈래요. 엉? 엉? 그래도 돼요?"
색연필 이야기다.
학교에 보낸 색연필과 사인펜은 12색. 제 딴에는 표현해 보고 싶은 색이 많은데 12색으로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불평.
"선생님께서는 엄~~~청 큰 색연필 가져온 00이에게 무슨 말씀 하셨어?"
몽실이는 고개를 다시 푸욱 숙인다.
"너무 크다고, 작은 것으로 바꿔오라고요."
목소리도 작아진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색이 많으면 그림 그릴 때 더 잘 그려질 거 같은데?"
엄마의 질문에 몽실이 고개를 갸웃. 그 이유까지 추측하긴 어려운 가 보다. 그래도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다.
"친구들이 샘낼까봐요?"
아이다운 대답이다. 00이의 색연필이 많이 부러웠나 보다. 몽실이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며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저학년 교실에서는 그들만의 "권력"이 암암리에 존재한다.
때론, 그 권력이 물리적인 "힘"일 때도 있고, 몰래 가져온 "장난감"일 때도 있고, 포켓몬 빵 속에서 나오는 작은 "스티커"일 때도 있다. 신기해보이는 학용품일 때도 있고, 새 핸드폰일 때도 있다.
몇년 전에 지도했던,
소심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에 잘 집중하지 못했던 한 아이가 떠오른다.
그림 그리기 활동을 할 때면, '떠억~' 하니 그 아이 책상에 올려졌던 48색 색연필. 저학년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연필처럼 깎아쓰는 얇은 색연필.
학교 책상이 그리 넓지 않으니, 그 색연필통은 항상 짝궁 자리까지 차지하거나 옆 통로까지 삐죽 나와있을 때가 많았고. 지나가던 친구들이 "툭"치고 가면 "우르르~" 요란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곤 했었다. 철제로 만들어진 색연필 통은 "와장창"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질 때도 많았다.
색연필이 온통 책상을 차지하고 있으니, 도화지는 놓을 데가 없어서 색연필 케이스 위에 구겨진 채로 너덜너덜. 그 옆으로 꺼내어진 10여 개의 색연필이 굴러다니고 있으니,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색연필로 행위 예술을 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
"00아, 오늘 주인공은 네 '그림'인데, '색연필'이 주인공이 된 거 같구나?"
그 옆을 지나가던 내가 한마디 던지자, 00이는 도대체 선생님이 뭔 소리를 하시는지 어리둥절한 표정.
"색연필 통이 너무 커서 불편하지 않니? 친구들처럼 12색 가져오고, 이것은 집에서 사용하면 어떨까?"
아이는 고개를 절래 절래.
얼굴색도금방 어두어진다.
아이의 속마음이 짐작되지 않는것은 아니다.
그 색연필은,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어 필요한 도구라기보다,
소심한 그 아이가 놓을 수 없는 소중한 "권력"이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
평소엔 친구들의 뒷편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아이가 유일하게 돋보이는 시간이
그 색연필을 사용하는 이 순간이니까.
여기 저기서 "이 색 좀 빌려줘.", "나 이 것 좀 써도 돼?", "이 색 진짜 이쁘다", "와~ 금색도 있어."라며 그림 그리기 시간만 되면, 그 아이 주변으로 몰려들던 아이들.
그러면 그 아인,
평소와는 사뭇 다른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빌려주기도 하고,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때론, 그 문제의 48색 색연필로 인해 소소한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선생님, 00이가 저에게 색연필 안 빌려줘요. 다른 애들에겐 다 빌려주면서!"
"선생님, 00이 색연필이 자꾸 제 책상으로 넘어와서 불편해요!"
"선생님, 00이는 왜 12색 색연필 안 가져와요? 저도 저렇게 큰 거 가져와도 돼요? 우리 집엔 더 큰 거 있어요."
비록 작고 미미하지만,
색연필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며,
친구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참 짠했던 그 녀석.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통해 돋보이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어른들이 가르쳐준 행동이 아닐까.
더 큰자동차, 더 넓은 집, 더 비싼 명품 등으로 존재감을 뽐내고자 하는 어른들이 많으니.
그런 어른 중에 한 사람인 나도 떳떳하지는 못한 처지.
학기초에 담임 선생님들이 학생 개인 준비물을 안내하실 때,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는 "12색 색연필", "12색 사인펜"이라고 색칠 도구의 사이즈를 지정해주시곤 한다. 물론 다양한 색깔의 좀더 큰 색칠도구를 사용하면 훨씬 풍성한 표현력을 기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학년 수준에서는 12색으로도 충분하며, 서로 색을 섞어 또다른 색을 만들어 내며 색칠할 수도 있으니 굳이 큰 것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너무 사이즈가 크면, 저학년 학생 스스로 준비하고 정리하기 버겨우며, 좁은 책상으로 인해 오히려 활동에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색연필 뿐만 아니다.
너무 큰 필통, 장난감 장치가 달린 학용품, 덜그럭 소리가 나는 학용품 등도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수업 집중에 도움이 된다. 교실 책상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교과서와 필통을 올려놓으면 꽉 찰 정도. 그러니 소리 나지 않는 평범한 필통, 단순한 모양의 연필, 지우개 등을 준비시켜 주는 것이 우리 아이가 학습의 주인공의 되는 비결이리라.
"몽실이 선생님께서는 왜 12색 색연필을 가져오라 하셨을까?"
엄마의 물음에, 이것 저것 더 대답을 찾아보는 몽실이.
"책상에 올려놓기 힘들 거 같아요."
"정리하기 불편할 거 같아요."
열심히 답을 찾는 거 보니, 이미 이 녀석 머릿속에는 48색 색연필을 학교에 가져가면 안되는 까닭이 들어 있었나 보다.
"우리 몽실이 생각이 다 맞는 거 같구나. 그래서 선생님께서 큰 거 말고, 12색 가져오라 하신 거 같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듯.
이 걸 가져가면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할까, 얼마나 인기를 끌며 주목 받을까' 하는 욕심을 내려놓기 어려운 듯, 자꾸만 그래도 48색 색연필을 가져가도 되는 이유를 늘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