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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이 May 12. 2023

25년 만에 지킨 '스승의 날'의 약속

'스승'이 아닌 '선생'의 고백

 25년 경력 중 나는 한 번도 감히 '스승'인 적이 없다. 항상 나는 '선생'이었다. 학생들보다 좀 더 일찍 태어나 먼저 경험하고, 먼저 배우고, 먼저 깨달은 사람일 뿐.


 그래서 초임 때부터 나는 '스승의 날'이 불편했었더랬다. 이렇게 모자라고, 한없이 부족한 사람에게 '스승'이란 거창한 감투를 씌우고, 존경한다고 하고, 고맙다고 하는 그 날이 나에겐 버겨웠다.

 스승의 날이면 의례 조회를 통해 강요된 '감사 의식'이 치뤄지곤 했는데, 항상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앞에 계신 너희들의 스승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라"고 시키셨고, 나는 학생들 앞에 엉거주춤 서서 어색하게 아이들의 인사를 받곤 했었다. 뻘쭘 했었다. 불편했었다.


 무엇보다도 불편한 것은 학부모들의 감사 선물.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여서 스승의 날엔, 학생들이 카네이션, 조그마한 선물상자를 스승의 날 아침부터 담임 선생님께 들이밀곤 했었다. 학부모들은 며칠 전부터 올해는 무슨 선물을 드려야하나 머리를 쥐어짜곤 했던 그 때.


  나는 일주일 전 부터 스승의 날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학부모들에게 일일히 편지를 보냈었고. 그래도 선물을 보내온 경우,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을 써서 선물과 함께 돌려보냈다. 그로인해  동료, 선배 교사들로부터 "너만 그렇게 깨끗하냐?"는 비아냥 거림을 들었었고, 상처도 받았었다. 선물을 돌려받으신 학부모들도 얼마되지도 않는 선물인데 굳이 돌려주셔야 했냐며 나를 은근히 돌려서 비난했었다.


 초짜 선생의 줏대였을까. 알량한 자존심이었을까. 내가 남들보다 청렴해서여서는 아니었다. 도덕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학부모에게 무엇 하나 받으면, 나는 떳떳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기 어려울 거 같은 위기 의식으로 했던 행동. 내가 "선생"으로서 지키고 싶은 최소한의 마지막 '선'이라고 할까. 참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상처입히고, 나도 상처받았던 그 시절, 여러 해의 반복되었던 그때의 스승의 날들.







 시대가 바뀌었다.

 20여 년 동안 스승의 날이면 학부모에게 보내던 "선물 사절" 편지는 이젠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학부모들이 알아서 커피 한 잔도 보내오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스승의 날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마치 무엇가를 바라고 있는 탐욕적인 집단인 것 처럼, 촌지를 받아야 학생들에게 잘 해주는 사람들인 것처럼, 그래서 촌지를 금지시키는 법안까지 만들어 족쇄를 채워야 하는 그런 존재들이 "교사"인 것 처럼 호도되는 시대. 철밥통.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집단 이라는 이름의 교사. 씁쓸하고 가슴 아프다.


 더군다나 교육 현장은 점점 처참해지고 있다. 학교폭력, 악성 민원, 교권 실추, 각종 소송에 시달리는 힘 없는 교사. 학부모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맞고, 성희롱 당하고. 그래도 교사는 학생들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참고, 희생해야하는 "스승"이라는 압박들.

 

  그런데, 스승의 날 즈음이면 온통 언론은 "참 스승"을 운운하며, 교사들을 띄워 주는 뉴스로 가득 메워지곤 한다.

 그래서일까. 지치고 힘든 교사들에게 "스승의 날"은 오히려 위로보다는 빈정거림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스승의 날이 불편한 것은 아마도 다른 교사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많은 교사들이 "스승의 날" 폐지에 찬성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스승의 날 폐지에 두 손 들고 찬성하고 싶다!


  사장의 날, 회사원의 날이 없듯, 스승의 날도 없길 바란다. 우리 교사들은 다른 일반 직상인들처럼 그저 하루 하루 내 몫의 책임을 해 나갈 뿐이다. 무슨 날을 만들어 찬양해 주지 않아도, 축하해 주지 않아도 만족한다.

 몸에 맞지 않는 "스승"이라는 옷을 입히고,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인내심을 요구하고, 더 많은 희생과 봉사를 강요하는 불편한 그 날을 반대한다. 의미를 이미 상실한 그 날이 없어지길 바란다.


 네가 참 스승이 못 되었다고 해서 "스승의 날" 폐지를 운운하며, 수많은 은사님들을 모욕하지 말라고 손가락질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스승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이름 없이, 수고 하신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지금 우리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분들까지 한 묶음으로 묶어, 뒤에선 조롱하면서, 앞에서는 꽃다발을 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스승의 날 즈음, 학부모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나는 항상 "스승의 날"의 참 의미를 자녀에게 교육하고 싶으시면, 현 담임에게 값비싼 선물을 사서 보내는 것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작년 담임 선생님을 찾아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을 드리곤 했었다. 

 작년 선생님께도 뜻밖의 기쁨과 힘을 드릴 수 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녀에게도 좋은 교육이 되리라하는 믿음에서였다.

 

25년 만에 나는 나의 조언대로, 

그 약속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늦동이 몽실이 덕분이다.

25년간 걸쳐왔던

"선생"이란 옷을 잠시 벗어두고, 육아 휴직으로 "학부모"의 옷을 입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승의 날을 앞둔 12일 금요일.

 몽실이의 손을 잡고, 작년 몽실이 담임 선생님을 찾아 뵙기로 했다. 스승의 날은 번잡할 수 있을 거 같아 미리 서둘렀다.


 몽실이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쓴 감사 편지를 손에 들고, 병설 유치원 문을 두드렸다.

나보다 더 들뜬 몽실이.

유치원 선생님을 오랜만에 뵐 수 있어서 행복하단다.

엄마인 나도 살짝 설렌다.


 울보, 떼보, 편식쟁이, 가끔 팬티에 실수도 하던 녀석을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고마우신 선생님. 말썽 피울 때도 많았을 텐데, 항상 긍정적인 태도로 몽실이를 감싸 주셨던 푸근하신 그 분. 그 분의 수고와 사랑 덕분에 몽실이가 학교에 입학해서 이렇게 의젓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나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손편지를 썼다.

 감사한 마음을 다 담기는 어렵지만, 몽실이와 내 편지가 선생님께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점점 힘겨워지는 교직 생활에서 찰라의 기쁨이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 힘을 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아마, 많은 교사들은

그런 "마음"을 받고 싶지 않을까.



"스승"은,

선생들이 부단한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보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학생과 학부모, 때론 동료 교사들에게, 언론으로 인해

상처받고 낙담하고

힘을 잃어버린 수많은 선생님들!!


순수한 아이들의 맑은 웃음과

따뜻한 마음을 받으시고,

오늘도

힘내시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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