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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r 13. 2020

아이도 키우고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다

애 키우는 엄마는 좀 그러면 안되나?

결혼 7년만에 시험관으로 아기가 생겼다. 안 귀한 자식이 어딨겠냐마는 이 정도면 대부분 인정하는 귀한 자식이지 않나 싶다. 아이가 참 예쁘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 힘들어도 아이가 예쁘지 않은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아이의 잠투정이 귀엽다고 했더니 돌아기를 키우는 동생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했다.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럽기만 하지만 그렇다고 육아가 덜 힘든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육아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으면 육체적인 힘듦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불안하다. 이렇게 아이만 보다가 '누구 엄마'만 남고 '나'라는 사람은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육아의 고충이 잘 드러나는 영화 <툴리> 중의 한 장면


임신했을 때부터 육아의 무서움에 대해서 익히 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주륵주륵 난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 '밥을 챙겨 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꼴이 아니다', '잠을 잘 수 없다' 등등.  너무 많이 들은 탓인지 임신했을 때부터 출산 후가 두려웠다. 아이를 낳고 내 인생이 없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책에 집착했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집으로 와서 본격 육아에 돌입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침대에 내려놓기만 하면 깨는 아이를 안아 재우면서 책을 읽었고, 아이를 어깨에 매달고 트림을 시키면서 책을 읽었다. 잠깐 쉴 틈이 생겨도 책을 읽었다. 이 덕분에 임신 기간보다 출산 후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나를 대단하다고 했지만 이건 단지 불안때문이었다.


아이가 백일이 지나면서는 브런치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아이 낳기 전에도 드문드문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었는데 이제 브런치라는 내 공간에 지속적으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아이를 재우고 난 뒤 9시 이후 뿐이라 글쓰기 시간은 간단히 정해졌다. 글을 쓰는 건 생각보다 재밌다. 글을 한 편 완성했다는 것이 뿌듯하고,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또 라이킷이나 구독자가 있으면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재밌고 신기해서 브런치에 하루에도 몇번씩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그런데 문제는 글을 쓰는 시간만큼 자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다. 아쉽게도 내 아이는 아직 새벽 수유를 하는데 글쓰는 시간으로 안 그래도 부족한 수면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글을 쓴 다음날은 하루종일 비몽사몽이라 아이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몸이 피곤하니 분유 먹이면서 졸고, 다 귀찮고, 아이 혼자 모빌 보게 하는 시간이 늘었다. 여기에 아이를 열심히 돌보지 않는다는 죄책감은 보너스다. 피곤함에 도저히 안 되겠어서 밤에 글을 안 쓰고 잤더니 다음날 몸이 훨씬 가벼웠다. 낮동안 아이를 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이 낳고 모든 것이 변했다. 온 몸의 유수분이 다 빠져나가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머리는 매일 끝도 없이 빠진다. 손목, 발목, 무릎 관절도 예전 같지 않다. 살은 쪄서 빠지지 않고, 배는 아직도 임신 5개월 때와 같이 나와 있다. 미용실 못 간지 오래라 곱슬 머리는 정돈이 되지 않는다. 달라진 몸을 생각하면 우울해져서 거울은 웬만하면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 모든 변화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지낸다. 그런데 아이 낳은지 100일이 더 지난 지금도, 나는 고작 글쓰는 2,3시간을 내기가 이렇게 힘들단 말인가. 이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화<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이 에바가 그린 세계지도를 망쳐놓은 장면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인상깊은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 에바가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우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공사장에 가서 한참을 있는 장면이다. 또다른 장면은 출산 전 여행가였던 에바가 벽에 세계지도를 그리며 행복해하고 이를 지켜보던 아들 케빈이 물감을 뿌려 다 망쳐버리는 부분이다. 보통 이 영화를 모성의 부재가 아이를 어떻게 나쁘게 만드는가를 말할 때 인용하곤 하는데 난 오히려 주인공 에바에게 감정이입이 됐다.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되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그는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 것인가. 출산한지 얼마 안 된 그가 우는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 출산 전의 자유로움을 절실하게 그리워한 것이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를 거꾸로 묻고 싶다.


나는 아이도 잘 키우고 싶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계속 하고 싶다. <캐빈에 대하여>의 에바는 그를 방치한 사회와 남편으로 인해 출산 후 포기해야 했던 많은 것들을 그리워만 했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아이를 더 많이 예뻐해줄 수 없었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을 찾아 계속 하고 싶다. 이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고 아이를 키우는 데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아이와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 애 키우는 엄마는 좀 그러면 안되나?


당장 글쓰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어떻게 조절해서 글쓰기를 이어나가야 할 지는 모르겠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다 보면 최적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다. 육아와 좋아하는 것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하게 되겠지만 둘 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 글은 육아에 지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쓰는 단호한 나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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