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고
난 늘 의자가 불편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을 때는 항상 까치발을 해야 했다. 이것이 불편하니 의자에 앉으면 다리를 꼬거나 다리를 접어 양반 다리를 했다. 척추, 관절에 안 좋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에 있는 의자들도 다 불편했다. 높이를 조절 할 수 없는 의자는 원래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문득, 남편도 의자에 앉으면 다리가 바닥에 안 닿는지 궁금했다. 바닥에 닿는다고, 편하다고 했다. 이럴 수가. 남편은 지금껏 나와 같은 불편함을 겪지 않고 살았다니. 키가 크니까 당연히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는 것이고, 나는 그에 비해 키가 작으니 바닥에 발이 안 닿는 것인데 이 단순한 것을 왜 몰랐을까.
의자는 원래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여자 평균키 163센치인 나는 늘 의자가 불편했지만, 남자 평균키 176센치의 남편은 대부분의 의자가 편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의자들은 모두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서 성인 여성 평균키인 나에게는 불편했던 것이다.
이 일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의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 지고, 사용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집안에 있는 책상, 가구, 창문의 높이, 문 손잡이 위치를 유심히 살펴보게 됐다. 이것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걸까.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의 첫 번째 꼭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지식에 대하여 : 여성의 몸이 사라진 과학’은 의학에서 어떤 몸을 표준으로 하고 있는지를 묻는 글이다. 널리 알려진 사무실 적정 온도 21도는 남성을 기준으로 했을 경우이고, 여성에게 적정 온도는 23.2도와 26.1도 사이이다. 불면증 치료제 졸피뎀의 처방 용량은 20여년 동안 10mg이었지만, 여성의 경우 부작용이 크기에 용량을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결론이 2013년에서야 발표되었다. 가정은 휴식의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는 스트레스 수치가 최고조에 달하게 만드는 노동의 장소이다.
그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것만 같은 의학에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배제하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하긴 의학에서, 사회에서, 세상에서 여성만 배제되었겠는가. 장애인, 동성애자, 아동, 노인 등 수많은 약자들이 평균과 보편, 상식에서 배제된 채 대부분의 지식은 만들어져 왔을 것이다. 무엇을 배제했는지도 모른 채.
사회의 보편적인 지식, 상식에 대해 질문해 봐야 한다. 누구에게 보편적이며, 누구를 기준으로 상식인지를 더 섬세하게, 예민하게 살펴봐야한다. 불편한 의자를 당연한 것인 줄 알고 평생 참으면서 지내지 않으려면. 죄없는 짧은 다리를 탓하지 않으려면. 참, 나는 다리가 바닥에 닿는 편안한 의자를 사서 잘 쓰고 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객관적이라 생각되는 질병에 대한 생물학적인 정보 역시 그 지식을 만들어낸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노란 벽지> 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여성은 오랜 기간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도록 침묵을 강요받았고, 여성의 질병은 남성이 생산해낸 의학지식으로 진단되고 치료 받았습니다.
그동안 실내 온도를 21도로 맞추었던 관리인과 과도한 용량의 수면제를 처방했던 의사는 여성을 차별하거나 아프게 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보고 배운 매뉴얼과 교과서의 내용에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이지요.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몸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여겨지는 상식에 대해 우리가 왜 의심하고 질문해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