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를 읽고
임신 기간이 행복하지 않았다. 보통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고들 하던데, 난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불행했다고 하면 좀 과한 것 같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험관 시술로 임신을 해서 시술과 동시에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했다. 그리고는 임신 초기라서 조심하고, 그다음엔 피가 비쳐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을 했지만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누워 지냈다. 괜찮아질만 하니 조기양막파열이 의심된다고 했다. 또 절대 안정. 이렇게 임신 5개월 정도까지 거의 누워서 지냈다.
누워서만 지내는 건, 생각과 달리 그리 쉽지 않았다. 티비도 하루 이틀이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은 불안하고 시간은 안 갔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그렇게 무력할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멍하니 휴대폰을 보면서 남편이 퇴근하기만 기다렸다.
임신으로 인한 평범한 통증들(평범하다고 괜찮다는 것은 아니다) 말고 나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다만 누워 있어야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외로웠다. 하루 종일 혼자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전처럼 마음껏 움직이고, 물건도 들고, 운전도 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는데 다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외로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끝없는 외로움에 혼자서 많이도 울었다.
살면서 크게 아파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이 경험은 꽤 큰 일이었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를 읽으며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1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서른아홉에 심장마비, 마흔에 암을 연달아 겪은 사람과 고작 임신 중의 작은 어려움을 겪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아픔은 지극히 주관적인 일이니. 책을 읽으며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외로웠을까?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은 퇴근하고 나를 잘 챙겨줬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신경써 주었다. 그런데 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되던 시간들이었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 함께 쉬지 못하고 불려 나오면서 아픈 사람은 조각나 떨어져 나오며, 무엇보다 삶의 자연스러운 주기라는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나의 언어는 삐끗한다. 아무것도 나를 잠에서 불러내지 않았다. 몸의 통증 때문에 일어났고, 통증을 의식하며 혼자 깨어 있으면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겪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55쪽)
아서 프랭크는 조화를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감히 ‘낮에 다른 사람들이 활동할 때 함께 활동하고’라는 말을 추가하고 싶다. 낮에 함께 활동하고, 밤에 함께 자는 별 것 아닌 일상이 아픈 사람에게는 너무도 그리운 일이 된다. 모두가 움직이는 낮 시간에 혼자 집에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면 세상에서 나 혼자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밤에는 밤대로 다리에 쥐가 나고, 복수(시험관 시술을 하면 복수가 잘 찬다)로 인해 숨쉬기가 힘들어 잠을 편히 자기가 어려웠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잔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절실히 깨닫는 날들이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외로움은 작가가 말하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일상으로부터, 건강한 자들로부터 추방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더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분히 들 수 있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달라고 부탁해야 할 때, 외출을 하고 싶지만 운전하는 것이 걱정돼서 포기해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배려해서 특별하게 대할 때 나는 외로웠다. 일상으로부터 추방당해서 외로웠다.
그런데 이 외로움을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나를 배려하고 나는 충분히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조차 왜 외로운지 알 수가 없는데 호강에 겨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외로웠다.
나아가 조화는 이야기되어야 한다. 표현되어야 한다. 형편없는 시구일지는 몰라도 나는 다시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형태도 표현되든 일단 표현된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라도 그렇다.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59쪽)
이 책은 나조차 알 수 없었던 외로움의 이유를 알려주고,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나에게 언어를 찾아주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해받는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아팠을 때 자신을 진정으로 위해준 사람들은 모두 아파본 사람이거나 아픈 사람을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는데, 저자 역시 이제는 아팠던 사람이 되어 글로 다른 이들을 위로해준다.
잠깐이나마 아팠던 경험을 한 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됐다. 배는 아직 안 부르지만 조심해야 하는 임신부, 계단을 오르기 힘든 노인, 하루 종일 병원에서 지내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외출을 엄두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됐다.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됐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다가도 소소하게 커피 한 잔 할 수 있음에 기뻐한다. 바쁜 하루를 불평하다가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참 상투적이게도 아팠던 경험으로 건강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저자는 이 상투성에서 여러 발자국 더 나아가 질병을 위험한 기회라고 말한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17쪽)
< 아픈 몸을 살다>를 통해 경험으로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질병의 경험이 이렇게 놀라운 통찰을 얻게 해준다는 것이 언젠가는 질병을 얻게 될 모두에게 묘한 위안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아팠던 경험, 아팠던 지인, 언젠가는 아프게 될 나와 가족들, 돌봄 제공자가 될 나와 가족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어떤 환자 또는 돌봄제공자가 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면서 읽었다. 모두가 한번 이상은 질병을 갖게 되고 죽게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누구나 한번은 읽어야 할 책이다.
정희진 작가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에서 이 책에 대해 ‘독자의 삶만큼 읽을 수 있다’고 했다. 비교적 평범하게만 살아온 나의 삶만큼 읽은 것은 고작 이것 뿐이다. 질병을 겪었거나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훨씬 더 깊고 넓게 이해할 것이다. 책의 거의 모든 쪽에 표시를 해야 해서, 처음에 표시하다 나중에는 포기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사지 않고 빌린 것을 후회했다. 읽으실 분은 구입을 추천한다. 줄도 그어야 하거니와 분명 재독을 위해 이 책을 찾게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