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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Dec 20. 2020

난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13개월 된 아들과 소아과에 갔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나와 아이를 자꾸 쳐다봤다. 보고 고개를 돌렸다가 또 보고, 눈을 맞추고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가 아직 아기라서 쳐다보는 건가? 아니면 너무 예뻐서? 이상해서 동생에게 이야기했더니 이리 저리 이유를 찾다 내가 쉬지 않고 아이한테 말을 건네서 쳐다본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요즘 아이가 ‘빠방, 말’과 같은 유아어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장단을 맞춰서 대화하는 내 모습을 사람들이 신기해했던 거다.  

    

오래 전,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한 친구만 아이가 있었는데, 뷔페에 도착하자 친구는 아이를 아기 의자에 앉히더니 갑자기 그림책을 꺼냈다. 그리고는 내성적이었던 내 친구는 큰소리로 영어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적이 흘렀다. 나와 친구들은 황당하고 민망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내 친구가 왜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며 키득거리며 이야기 했다. 난 나중에 아이가 생겨도 사람 많은 곳에서 절대 노래를 부르거나 혀짧은 소리를 내지 않을 거라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난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많았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혀짧은 소리로 아이와 대화해서 보는 사람만 민망하게 만드는 ‘그런 엄마’, 책 한 권 한 권 골라서 사주지 않고 전집으로 왕창 사서 안기는 ‘그런 엄마’, 아이가 남긴 밥을 아무렇지 않게 주워 먹는 짜장면을 싫어하는 ‘그런 엄마’, 아이 것은 최고급으로 자신의 것은 최저가로만 사는 ‘그런 엄마’, 아이에게 습관적으로 미안해하고 죄책감 가지는 ‘그런 엄마’, 항상 자신보다 아이가 먼저인 ‘그런 엄마’. ‘그런 엄마’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은 지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난 정확하게 내가 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런 엄마’가 되었다. 사람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하루 종일 아이와 같이 옹알이하고, 가성비는 역시 전집이라며 전집 만능주의자가 되었고, 아이가 남긴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아이 것은 유기농, 무독성, 친환경만 사고 내 것은 오늘 행주를 샀다. 아이가 넘어져서 울면 넘어지기 전에 못 봐서 미안하다고 몇 번을 말한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었다. 임신했을 때만 해도 이기적인 엄마가 되겠다고 그렇게 다짐을 했었는데. 1년 전만 해도 도도한 현대 여성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전통적인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어릴 때, 항상 자신의 것은 챙기지 않고 나한테만 좋은 것을 해주려는 엄마가 불만이었다. 나를 자신보다도 남편보다도 우선시 하는 것이 미안하고 부담스러웠다. 엄마의 낡은 속옷이, 내가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버릇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나는 다른 엄마가 되고 싶었다. 쿨한 엄마, 생각하면 웃긴 엄마,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랬었는데 1년 만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내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건 아이를 우선시 하는 엄마의 모습이었는데, 은연중에 나는 희생적인 엄마를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온갖 것을 요구하고 잣대를 들이대고 평가질을 한다. 한 쪽에서는 모성을 강조하면서 미화시키고, 최근에는 부부 관계를 최우선시 하면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후자 쪽의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전자의 모습을 보이는 스스로가 당황스럽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되기 싫었던 ‘그런 엄마’가 되고 보니 이게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밖에 모르는 자식 바보 엄마든, 여전히 자신이 우선인 엄마든 뭐 어떤가? 70억의 사람이 있으면 70억의 다른 엄마들이 있겠지. 뷔페에 가서 큰소리로 영어동요를 불러서 아이를 얌전하게 만드는 엄마도 있고, 병원에 가서도 집에서처럼 아이와 쉬지 않고 말하는 엄마도 있다. 세상에 ‘그런 엄마’는 없다. 각기 다 다른 엄마들만 있을 뿐이다.      


앞으로 내가 어떤 엄마로 변신하고 성장할지 모르겠다. 내 모습을 짐작조차 못하겠어서 궁금하고 두렵고 설렌다. 다만 이제는 어떤 엄마가 되겠다나 안 되겠다는 그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뷔페에서 동요 부른 내 친구를 비웃었던 내 모습을 반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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