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시키지 않는 글쓰기를 계속 하려는 이유
이 책의 제목,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나다운 표현이긴 하지만, 제목으로 정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당신은 왜 글을 쓰나요?", "당신에게 글은 무슨 의미입니까?" 같은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그걸 어떻게 말로..."라며 머뭇거린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9쪽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 - 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10쪽
나는 송고할 때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마음속 땅으로 꺼졌다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편집자에게 늘 하는 말도 "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부족한 글을 보내 죄송합니다."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 크래프트의 걸작도 생계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도 작가 자신의 말대로 "상업적 목적으로 '부실하게 ' 나온 책"이라니! 겸손의 뜻도 있겠지만 절박성이 느껴진다. ... 울스턴 크래프트의 이야기는 나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용기를 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 쓴다>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