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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r 02. 2020

나는 왜 쓰는가

아무도 시키지 않는 글쓰기를 계속 하려는 이유

'나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이 너무 거창하여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제목 앞에서 주눅이 든다. 조지 오웰(<나는 왜 쓰는가>의 저자) 정도는 되어야 자신이 왜 쓰는지에 대해 민망해하지 않으면서 밝힐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조지 오웰은 커녕, 나에게 글 써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하나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이 질문이 더 의미가 있다. 글을 쓰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글을 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렇게 혼자서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지. 작가가 왜 쓰는지 보다 이게 더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닐까.


'글쓰기' 근처를 참으로 지속적으로 얼쩡거리고 있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지만 혼자서 '글을 써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 것도 쓰지 않아도 되는건지'에 대해 고민한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 필사를 하겠다고 공책을 산 것도 여러번, 책을 읽고 감상을 워드로 작성하려는 시도도 여러 번이다.(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시도는 없다.) 최근에는 '숭례문학당'이라는 읽기, 쓰기, 토론 등의 모임을 주도하는 곳을 알게 되어 온라인으로 100일 글쓰기, 서평쓰기, 필사하기 등에 계속 해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 글쓰기에  대해 혼자 고민하고, 혼자 시도하고, 혼자 실망한다. 이쯤이면 정말로 짚고 넘어가야 겠다. 나는 도대체 왜 쓰려고 하는가.


이 책의 제목,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는 나다운 표현이긴 하지만, 제목으로 정하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당신은 왜 글을 쓰나요?", "당신에게 글은 무슨 의미입니까?" 같은 질문을 받을 때, 나는 "그걸 어떻게 말로..."라며 머뭇거린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하고 목적도 분명하다. "저는요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써요." 이렇게 바로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적절한 사회 생활 태도를 신경쓰는지라 '고상한' 말로 둘러대곤 한다. 그런데 급기야는 책 제목으로 정했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9쪽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답이 참으로 명쾌하다. 나쁜 인간을 응징하려고 글을 쓰다니. 나도 글로 나쁜 인간을 응징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글은 누군가를 응징할만한 수준이 안될 뿐더러 나에게는 그런 영향력도 없다. 언젠가는 나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을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 - 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 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10쪽


내가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하려고 하는 이유는 잘 쓰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남들은 보지 못한 세계를 나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서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싶다.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에게 주는 대로 적당히 관습과 제도에 적응하면서, 적당한 편견을 가지고, 적당히 대세에 따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적당히 살고 싶지는 않다.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든 내가 가진 렌즈로, 나에게 맞는 언어로 해석해서, 관습과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도 한발짝 떨어지려고 노력은 하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이 글쓰기다.


나만의 관점, 언어, 상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글쓰기가 필요하다. 읽고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하는 최종과정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무엇이 되었든 글을 계속해서 쓰다보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더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나를 쓰게 만든다. 매일 글을 써야 겠다는 다짐이 매번 얼마 못 가지만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글쓰기에 더 용기를 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나는 송고할 때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마음속 땅으로 꺼졌다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편집자에게 늘 하는 말도 "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부족한 글을 보내 죄송합니다."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 크래프트의 걸작도 생계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도 작가 자신의 말대로 "상업적 목적으로 '부실하게 ' 나온 책"이라니! 겸손의 뜻도 있겠지만 절박성이 느껴진다. ... 울스턴 크래프트의 이야기는 나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용기를 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 쓴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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