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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Jun 08. 2021

남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Hello, stranger!

그와 친하게 지낸지 19년이 됐다. 긴 세월 알았지만, 그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엔 망설여진다. 그가 이 시간에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저 행동의 다음은 무엇일지는 알지만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지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해 다만 아는 것을 알 뿐이다.

    

그는 자신을 잘 돌본다. 휴식 시간을 알차게 잘 보낸다. 집에서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착실하게 수행하는데 그 일들이 모두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밥을 챙겨 먹는다. 밥을 먹고 나서는 좋아하는 간식인 쿠키와 아이스크림도 빠뜨리지 않는다. 운동을 하고 목욕을 하고 햇볕을 쬐며 산책을 한다. 가벼운 외출을 하고 좋아하는 물소리를 들으러 가기도 한다.

    

비오는 날이면 전을 먹어야 한다고 부추와 해물을 사와서 전을 부치고, 정월대보름엔 마트에서 정월대보름 음식 세트를 사와서 잡곡밥을 하고 부럼을 깨 먹는다. 자기 몸이 편한 대로 살기는 쉬워도 자신을 돌보며 살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매일 매일 스스로를 돌보고 그것을 일상에서 제일 우선순위에 둔다.

    

그는 세상의 존재들을 사랑한다. 그는 아내를 만나기 전만해도 고양이를 무서워했는데 그럼에도 차 트렁크에 장갑, 삽 등을 넣어놓고 로드킬 당한 고양이 사체를 보면 길가에 치워주거나 땅에 묻어주곤 했다. 죽은 고양이의 명복을 빌어줬다고 한다.

    

아내로 인해 고양이를 좋아하게 됐고, 동네 고양이들 밥을 주게 됐으며, 집 안에 복이라는 고양이를 키우게 됐다. 한번은 아내가 귀찮다며 식수로 쓰지 않는 지하수를 복이가 마실 물로 주자 그는 발끈하며 말했다. “그 물이 먹어도 되는 물이면 당신은 왜 안 먹어?” 평소에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는 남편의 이런 모습에 아내는 반했다고 한다. 복이의 물을 위해 화내는 모습이 섹시했다나.

    

그는 집 데크에 거주하는 고양이들에게 매일 사료를 주는데 최근에는 아침에 찾아오는 물까치들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출근 길에 마을 곳곳에 묶여 있는 개들에게 간식을 던져주는 것도 그의 즐거움이다. 이웃집 개가 사람 없는 빈 집에 홀로 묶여 있을 때 1년여 정도 매일 산책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의 존재에 대한 사랑은 생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최근에 아내가 타던 2002년식 아반떼를 폐차시켰는데 그는 이 차를 보낼 때 마음 아파했다. 오랫동안 같이 지냈는데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 울컥했다고 한다. 차 주인이었던 아내는 그에게 갱년기냐고 물을 뿐이었다.


그는 손편지를 자주 쓴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특별한 날 쓰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그는 생각지 못한 사람들에게 쓰곤 한다. 특히 아이가 생기면서 그런 일이 잦아졌는데 그 대상은 시험관 시술 의사, 제왕절개 수술 의사, 출산 병원 간호사, 산후조리원 간호조무사, 방문만 하고 다니지는 않게 된 어린이집 원장, 현재 다니는 어린이집 담임 교사이다.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싶은데 그는 a4 2장, 편지지로 하면 4장 정도를 써서 준다. 대개 편지는 부부 소개, 편지 수신인을 만나게 된 과정, 상대에 대한 감사함 표시, 행복 기원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원장님의 그 마음을 100퍼센트로 받아들인 각각의 우주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들이 원장님 주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아들이라 선생님의 눈빛과 쓰다듬는 손길은 기억하지 못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뇌에는 그 따스함이 녹아 아름다운 피가 흐르게 하고 향기로운 영혼이 영글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편지를 받은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한번은 아내가 물어본 적이 있다. 편지 읽은 사람이 눈물 흘리게 하는 게 목표냐고. 그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다른 사람 울게 만들고 보는 것이 취미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아는 것 중 일부를 적었는데 그것은 모두 나에게 없어 탐나는 그의 모습인 걸 알았다.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인색한 나는 자신을 돌보고, 남을 돌보는 능력을 가진 그가 가끔 부럽다. 차갑고 무정한 나에게 따뜻하고 다정한 그가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잘 돌보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손편지를 잘 쓰는 사람이다. 그는 내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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