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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r 06. 2020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글을 쓴다고?

<정희진의 글쓰기  1,2>를 읽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은 어렵다. 좋아하는 마음은 큰 데 그것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는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평정심을 잃고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좋아하는 책의 서평을 쓰는 것은 힘들다. 내가 감히 서평을 써도 되는지부터 의문이 든다. 그래서 진짜 좋아하는 책 서평은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평을 쓸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책을 빼고 서평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래서 오늘 감히 서평 쓰는 것에 용기를 내본다. 좋아하는 책에 대해 마음대로 한번 써보겠다고, 원래 작가 손을 떠난 책은 독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더냐고 힘을 내 본다.


정희진 작가를 좋아한다. 제일 먼저는 여성학자로 좋아하고, 그 다음 여성주의 시선이 담긴 그의 글을 좋아한다. 기존의 이분법적 틀을 깨부수고 제3의 관점을 제시하는 대담함, 현상의 본질을 꿰뜷어보는 통찰력, 이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체를 사랑한다.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 새로운 관점이 많은데 사유와 글의 형식이 정확하게 일치하여 군더더기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이 아닌지 그의 글을 글쓰기 모임에서 필사용으로 많이 참고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가 나오게 됐다. 먼저 2권만 출간이 됐는데 1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와 2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가 그것이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1,2>는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했던 서평 '정희진의 어떤 메모'를 모아서 엮은 책이다. 글쓰기 시리즈라고 해서 글쓰기에 대해 쓴 글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서평 모음집이어서 의아했다. 하지만 곧 수긍했다. 정희진의 서평 그 자체가 글쓰기의 교재일 것이니 말이다. 그의 서평은 서평이라고 알고 읽지 않으면 그냥 산문글로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보통 서평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의 내용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거의 없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데 책의 내용을 '인용'하는 정도이다. 서평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이내 '역시 정희진'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평을 뻔하지 않게, 재밌게 쓰기는 어렵다. 책 내용에 치우치면 지루하고,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에 치우치면 엉뚱한 글이 되기 쉽다. 그런데 정희진의 서평은 새롭고 흥미롭다. 그의 다른 글들처럼 서평 역시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생각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오히려 이 책이 서평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것은 서평 그 이상이다. 서평이라고 하면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가를 주로 생각하여 2차적인 글의 느낌이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새로운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서평이라는 틀에 가둔단 말인가. 이 글들을 묶기에 서평이라는 분류는 너무 좁다. 


'글쓰기 시리즈, 서평' 이란 말에 속지 말고 정희진의 글이 읽고 싶은 사람, 틀을 깨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사람, 명료하고 정확한 글을 보고 싶은  사람은 그 누구든 이 책을 집어들면 된다. 글을 읽는데 머리가 시원해지고 명치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내려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품위는 약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약자에게는 폭력이라는 자원이 없다. 이런 세상에서 나의 무기는 나에겐 '있되', '적'에겐 없는 것. 바로 글쓰기다. '적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 사회적 약자만 접근 가능한 대안적 사고, 새로운 글쓰기 방식,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내게만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내 비록 능력이 부족하고 소심해서 주어진 지면조차 감당 못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내 억울함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러면서 세상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 글쓰기다.  
정희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14쪽)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바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정희진,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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