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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릴라 Mar 09. 2020

82년생 김지영에게 커피는 단순한 커피가 아니다.

아이를 낳고 더 소중해진 커피의 의미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매일 오전에 한 잔, 오후에 한 잔 꼬박꼬박 마시는 건 단지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잠이 많은 내가 일을 하려면 커피 없이는 힘들었기에. 그런데 임신을 하고 커피를 끊고 나서 내가 커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임신하고 바로 휴직을 해서 밤에 10시간 자고 낮잠까지 챙겨서 자는 생활을 했는데도 커피가 계속 생각 났다. 커피향을 맡았을 때, 단 디저트를 먹을 때, 시간이 어정쩡하게 비었을 때마다 문득 문득 커피가 생각 났다. 그제야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임신 중에 커피가 먹고 싶을 때마다 늘 다짐했다. 아기만 낳고 나면 매일 커피를 사발째 들이킬 거라고. 매일 카페인에 쩔어서 살겠다고. 그런데 막상 산후조리원을 나와 집에서 신생아를 돌보다 보니 커피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2시간에 한 번 분유를 먹여야 하고, 트림 시키고, 기저귀 갈고, 재우고의 반복. 정신이 없었다. 아기가 태어나고 30일째 날 처음으로 집에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그 감격을 일기에 기록으로 남겼다. 처음보다 아이 돌보는 것에 적응을 하긴 했지만 아기가 낮잠을 혼자 자지 못하는 때였다. 아이는 침대에 내려 놓으면 운이 좋으면 30분만에, 운이 나쁘면 10분만에 잠을 깼는데, 이 와중에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 마셨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편하고 빠르게 커피 믹스나 드립백 커피로 마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시고 싶은 건 단순한 커피 한 잔이 아니었다.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고, 드리퍼에 여과지를 깔고, 간 원두를 담고, 원두에 물을 붓고, 기다리고, 또 붓고하는 과정을 거쳐서 컵에 담은 그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단순히 커피 한 잔을 좋아한다기 보다 커피를 내려 마시는 그 과정 전체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이 많아 머리가 복잡할 때, 마음이 어수선해서 안정되지 않을 때 천천히 커피를 내리다보면 머리가 시원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커피를 내리는 과정이 나에게는 명상을 하는 시간이었다. 임신했을 때 내가 마시고 싶었던 것도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커피를 내리는 과정 전체였기에 커피 믹스나 드립백 커피로는 대신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아기가 백일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매일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다. 아이를 하루 종일 안고 있어야 해서 정말 시간이 안 날때는 밥을 포기하고 커피를 내려 마신다. 그만큼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나에게 중요하다. 하루의 대부분 아이를 위해 시간을 보내지만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나면 힘을 내서 나에게 주어진 과업들을 잘 해낼 수 있다. 유독 지치고 기운이 없는 날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커피를 못 마신 날이다. 그런 날은 커피를 못 마실만큼 바쁜 날이라서 이기도 하고, 커피가 주는 힐링 시간을 못 가져서 이기도 하다. 지금 내게 커피는 커피 그 이상이다. 


아이를 낳고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아이가 없을 때 소설로 읽었었는데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모두가 내 이야기 같았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나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김지영에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사마시면서 편하게 사는 맘충'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24시간 아이를 돌보는 고강도의 무급노동자로 일하면서 겨우 시간을 내서 커피를 마시는 것에 맘충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화가 났다. 아이를 낳고 나서 커피 한 잔의 의미가 달라진 나에게 이 장면은 특히 인상 깊었다. '김지영도 나처럼 커피를 마시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더 화나고 마음이 아팠다.


직장에 다닐 때와 지금, 나에게 커피가 가지는 의미를 비교한다면 지금이 훨씬 더 무겁고 깊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지 못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나에게 시간이 많이 생기더라도, 누가 뭐라고 커피를 중상모략하더라도 커피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 다짐한다. 커피는 힘든 시절을 이겨내게 해주는 나의 소중한 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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