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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엽 Aug 29. 2015

변태 슬라이드,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1부. 프레젠테이션의 오해와 진실

어느 세미나에 참석한 두 사람의 대화입니다.

“선배, 저 슬라이드를 쳐다 보니까 머리만 아프고 짜증이 밀려오네요. 또 PT는 왜 저렇게 못하는지... ”
“그러게 말이야.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영어만 잔뜩 쓰여있고 발표도 엉망이네.”
“우리 일찍 나가서 시원한 커피나 마시죠”
“오케이~”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이처럼 기대가 무너지면서 시간을 다 못 채우고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프레젠테이션을 해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슬라이드를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어떻게든 슬라이드를 만들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 짜 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궁 속에 빠져듭니다. 이것은 프레젠테이션과 슬라이드를 거의  동일시하는 잘못된 통념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레젠테이션과 슬라이드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슬라이드란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조 도구에 불과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해보죠. 프레젠테이션에서 알맹이(내용)는 있는데 껍데기(발표 기술, 슬라이드 등)가 부족하면 청중의 설득이 어렵고, 껍데기는 화려한데 알맹이가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말장난이 됩니다. 프레젠테이션과 슬라이드는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그런데 회사, 학교, 공공기관 등에서 슬라이드가 실제로는 전혀 슬라이드답지 않게 사용되고 있어 문제입니다. 슬라이드의 생명이 시각화와 단순화에 있다면, 워드 문서는 논리구조와 구체적 내용이 근간이 됩니다. 양자는 이처럼 목적과 활용 형태가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슬라이드를 워드 문서같이 ‘빽빽한 텍스트’로 도배하면서 점점  변태스럽게 만듭니. 도무지 여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슬라이드를 보면서 청중은 어디에 눈길을 둘지 몰라 갈팡질팡 헤매다가 초점을 잃어버립니다. 필자는 이것을 '변태슬라이드'라고 부릅니다.


세미나, 심포지엄, 회사 내 업무보고 등 다양한 종류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변태 슬라이드가 넘쳐 나고 있습니다. 특히, 세미나에 가보면 발표자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엉망인 슬라이드를 띄워놓고 중얼중얼 읽다가 내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미처럼 연단에 찰싹 달라붙은 채 그저 읽기만 하는데도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고 허둥대기도 합니다. 이러니 청중은 집중을 하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보거나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는 것입니다. 한 권씩 나눠 주는 두툼한 세미나 책자에서 그나마 작은 위안을 얻는다고나 할까요?


사실 제대로 하려면 중요 부분만 시각화한 '발표용 슬라이드'를 따로 준비하고 상세한 내용이 담긴 자료는 별도로 인쇄하여 나눠 주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시도를 하지 않죠. ‘선배들이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 ‘업무에 바쁜데 두 가지 버전으로 자료를 만드는 게 귀찮아서’ 등의 핑계를 댑니다. 이처럼 별 고민 없이 습관적으로 만들어 온 변태 슬라이드는 지금도 곳곳에서 수 많은 청중을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현대카드에서는 사내에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은 이 달 한 달 간 본부별로 돌아가며 PPT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 '제로(ZERO) PPT 캠페인'을 실시하고 있다.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은 '직원들이 실제 업무에 대한 고민보다 파워포인트를 예쁘게  디자인하는 일에 시간을 과도하게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을 듣고 매우 놀랐다'며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직원들이 사업의 본질적인 고민보다 보고서 작성에 투입되고 있는지 상상만 해도 괴롭다'고 말했다.(머니투데이 2014.07.16)


물론 세상의 모든 슬라이드가 변태스러운 건 아닙니다.

전 세계를 감동으로 몰아 넣은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변태 슬라이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슬라이드는 한 마디로 비움, 단순함, 절제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으며 철저하게 계산된 시각자료가 발표 효과를 무한대로 끌어올립니다.


하지만 수십, 수백억이 걸린 공공 사업제안 발표에서도 극도로 단순화된 슬라이드가 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사업제안 발표자료를 스티브 잡스 스타일로 간결하게 만든다면 심사위원들의 심장이 멎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약간의 신선함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슬라이드에 담긴 문구 하나 하나를 꼼꼼하게 따지는 제안 발표의 관행과는 너무나 다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업제안 업무를 해본 직장인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스티브 잡스 스타일이 탁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항상 그를  따라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스타일은 상품이나 서비스 설명같이 그 특성을 청중에게 쉽게 이해시켜야 하는 경우에 효과적이며, 공공 사업제안 발표라면 텍스트가 넘쳐 나는 변태슬라이드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변태슬라이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단칼에 싹둑 잘라버릴 수 없는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프레젠테이션에는 고유한 목적이 있으며 설득해야 하는 청중에 따라 접근방법과 스타일을 달리 해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랍니다.


Presentation Insight

지금, 혹시라도 늘 해오던 대로 슬라이드를 만들고 있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이 슬라이드가 프레젠테이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표현형태일까?’

‘내가 청중이라면 이 슬라이드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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