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by 낭만 언니


추임새? 입버릇?



언제부터인가 앉았다가 일어날 때면

꼭 소리가 붙었다.

“아이고, 으쌰.”


추임새? 입버릇?

뭐가 됐든 허구한 날 입에 달고 다녔다.

어쩌다 아무 소리 없이 일어날 때는

볼일 보다가 만 것 같은

찝찝함마저 들 때도 있다.


그러다 동료나 일행이

비슷한 소리를 내는 걸 들으면

‘그래, 그거지.’

그제야 개운해지는 기분이 된다.


이유도 원인도 모르겠지만

내 입에 붙어사는 녀석들이 있다.

내가 의식하든 말든 말이다.


어쩔 땐 내가 그런 말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던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내가 듣기 싫어

일부러 떼려고 애쓴 적도 있다.


그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 입에 붙은 말 중에

‘힘들어’가 있다.


자고 일어나도,

배부르게 잘 먹고 나서도,

잘 놀다 와서도


‘힘들어’


당최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맥락도 없고 분위기에 맞지도 않는다.

눈치라곤 없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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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인생 선배님이 계신다.

60대가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곱고

여전히 활동적이다.


지독하게도 더웠던 작년 여름 어느 날,


“나 늙은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염색 안 하련다.

흰머리가 얼마나 빨리 올라오는지.

그냥 생긴 대로 살려고.”


그렇게 빛나는 은발을

찰랑거리며 다니신다.


염색하고 다녔을 땐

아무도 그 선배님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낮에 보면 50대 초반

밤에 보면 40대 후반


암튼, 작은 사업체를

3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었고,

모임에 나가도 언제나 회장님이었다.


두 자녀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좋은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도 결혼도 참 잘했고,

잘 살고 있다.


많은 후배나 지인들이

롤모델로 삼았고,

따르는 이도 많았다.


우연찮게 그 선배님과

둘만 있을 기회가 있었다.


모임의 약속 시간 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된 날,

그 선배님도 일찍 오셨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하고는

당당하고 밝은 얼굴로 맞아 주셨다.


이른 도착에 커피라도 한잔하자며,

마주 앉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선배님 본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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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선배님의 이야기다.


선배님의 어머님은 몸이 약하셨다.

선배님은 다섯 남매 중 네 번째.

위로 오빠 둘, 언니 하나, 남동생이 있었다.


선배님이 아기 때부터

아마도 서너 살? 무렵에도

엄마 곁에 가기가 어려웠다.


아픈 엄마에 동생까지.

큰 언니가 챙겨주기도 했지만

거의 혼자였다.


초등학교 시절엔

엄마는 아프다는 이유로

엄마는 집을 더 자주 비웠고,

남은 아이들을

돌봐 줄 사람은 없었다.


선배님과 10살이 넘게 차이 나는 큰 언니는

선배님이 초등학생일 때부터

돈을 벌어야만 했다.


선배님은 돌봐 줄 사람 없는

집을 떠나 언니, 오빠들과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님의 언니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선배님과 오빠 둘을 남기고

그 집을 떠났다.


선배님은 12살.


선배님은 언니가 떠나던 날,

하루 종일 울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언니와 함께 쓰던 방,

언니가 사라진 밤.


그 밤, 그 방을 잊을 수 없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선배님의 눈시울이 붉어지길 몇 번.

나는 훌쩍거리면서,

티슈를 찾아 선배님에게 건넸다.


“그 밤, 그 방에서 느낀 감정을

지금도 모르겠어. 너무 막막한데

그 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 감정.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렸는데.

그 어린아이가

무슨 감정인지 무슨 마음인지도 모르고

받아내야만 했던 그날 밤이 가끔 생각나.”


이야기를 듣는 나도

그날의 그 감정이 무엇인지 어려웠다.


“그리고 참,

자기는 그 예쁜 입으로

자꾸 힘들다고 하더라.

무슨 일 있어? 도와줄까?”


뜻밖에 질문에 당황했다.


“제가요? 그랬나요?”


얼버무리기 바빴다.


“난,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어릴 땐 나까지 힘들다고 하면

아픈 엄마가 나를 버리고 도망갈지 무서웠고,

언니랑 살 때,

겨울에 찬물에 빨래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가

얼마나 맞았는지.

그 말했다가 언니가 해야 할 빨래까지

내가 다 해야만 했었어.

그래서 그다음부턴

죽을 만큼 힘들어도 하지 않아.”


누구는 죽을 만큼 힘들어도 하지 않는 말을,

나는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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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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