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오래전 한겨레 신문을 통해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에게 썼던 편지를 오늘 다시 꺼내 올립니다. 그동안 가르쳐주시고 성장시켜 주신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박재동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1979년부터 81년까지 휘문고 학생이었던 홍성욱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저에게 선생님은 학교를 졸업한 지 2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명한 기억을 추억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갑작스럽게 학교를 그만두신 뒤 소식을 모르다가 <한겨레>의 시사만평 작가로 활동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선생님을 기억하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편지를 써서 알리고 싶었는데, 차일피일하다가 이제야 그 편지를 쓰면서 선생님께서 만들어 주신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빛바랜 사진 같은 기억이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미술 시간은 너무나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문 밖에 있는 벌판으로 나가 돌을 쌓아 올리기도 하고, 그 돌에 그림을 그렸던 수업, 그리고 언덕 아래로 종이비행기와 병뚜껑을 날리던 수업, 초겨울 바람에 운동장에서 연을 띄우던 수업, 영화의 장면을 한 사람씩 상상으로 이어가던 수업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느낌입니다.
어느 수업에서는 선생님께서 “만화를 그려볼 사람?”이라며 만화 그리기 희망자를 찾았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가 꿈을 꾸며 만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저로서는 가슴 설레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소심한 마음에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선뜻 손을 드는 사람이 없자, 선생님께서는 모두 눈을 감으라 하며 “딱 세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손을 들까 말까’ 하며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단호한 목소리로 “한 명”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두 명”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더 주저하면 기회를 잃게 될 것 같아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세 명” 하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 손을 든 사람은 저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선생님께서 만화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때 왜 그런 제의를 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일 만화에 재능이 있었다면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늘 충격적일 정도로 행복한 수업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행복한 시간은 고2 때의 중간고사 미술시험이었습니다. 잔뜩 긴장하며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접하는 순간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습니다. ‘자신이 날린 종이비행기의 경로를 그려보시오’라는 문제 밑에는 종이비행기 그림이 있었습니다. 문제를 보면서 우리들은 순간 놀란 토끼눈을 떴지만 이내 신나게 문제를 풀었습니다. 사뿐히 날아가는 비행 흔적을 그린 친구도 있었지만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풀듯이 어지럽게 연필을 뒤흔들었던 친구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시험 성적은 우리가 원하는 점수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각의 몽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느덧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26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회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바야흐로 굴뚝 경제 중심의 산업사회는 막을 내리고, 창의적 지식이 중심이 되는 지식사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분야에서 창의력이 가장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고 기업 교육에 관한 일을 하면서 가끔은 ‘창의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과 함께한 수업이 저의 창의력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이후에는 그런 수업을 받을 기회가 한 번도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언론을 통해 나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으로 뵙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대학 교수님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가르치는 학교의 학생들은 어떤 수업을 받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선생님의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참 좋겠다.’ 부러운 생각도 듭니다. 오래전 짧은 만남이었지만 저의 삶에 길게 영향을 주신 선생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