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리스트 이야기 08
안전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매뉴얼이 이슈가 된다. 비상사태에 해야 할 일의 내용이나 방법 등을 자세하게 기술 해 놓은 매뉴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갑작스럽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행동 원칙이 없으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게 되고, 천재로 시작된 사고가 인재로 바뀌게 될 수 있다. 그 사회의 수준은 매뉴얼의 준비도로 평가할 수 있다.
매뉴얼은 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지칭하기도 하고, 어떤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내용과 방법을 자세히 기술한 서류를 말하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매뉴얼은 보험의 약관처럼 복잡하다. 깨알 같은 내용을 꼼꼼히 읽는 사람도 있지만 웬만한 사람의 인내심으로는 읽기 힘들다. 어떤 매뉴얼은 순서조차 찾기 힘들다. 내 경우지만 매뉴얼의 내용을 찾다가 포기한 적도 여러 번이다.
아무리 훌륭한 매뉴얼이라도 활용하지 않는다면 수술은 성공했지만 환자는 죽은 꼴이 된다. 사람들은 기능이 많고 복잡한 TV 리모컨보다는 필수 기능만 있는 단순한 리모컨을 더 좋아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것은 빠진 내용이 없는 정교한 매뉴얼보다는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 수준의 단순한 도구일 수 있다.
매뉴얼이 필요한 이유는 일의 방법을 몰라서 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다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요리의 재료와 순서를 다 기억할 수 없듯이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일은 그 생소함이 당황스럽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요리도 요리책이 있으면 잘해 낼 수 있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의 내용과 순서를 담고 있는 체크리스트만 있으면 우리는 할 일을 잘 해낼 수 있다.
물론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에 관한 체크리스트는 무용지물이다. 반면에 잘 알고 있는 내용에 관해서는 복잡한 매뉴얼보다는 단순한 체크리스트가 훨씬 유용한 도구가 된다. 수준 높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매뉴얼도 필요하지만, 행동을 도와주는 체크리스트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