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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y 20. 2020

벌새

감히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 - 보고 듣고 말하기 #2

영화 벌새에서 은희는 학교를 오갈 때마다 재개발 구역을 지난다. 누군가 철문 위에 붉은 페인트로 죽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고 휘갈겨 쓴 자국을 학생들은 무심히 지나친다. 타인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되기도 한다. 대저 삶의 평범성은 고요하고 무탈하여, 그만큼 더 잔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벌새는 종종 철문의 모습을 비춰주지만, 철거민들을 스크린에 등장시키지는 않는다. 은희와 우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삶을 어림잡아 짐작하게 될 뿐이다. 아마 그들은 불행할 거라고, 아마 그들은 삶에 닥친 불행에 속절없이 휩쓸린 가여운 이들일 거라고. 언제나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그들의 삶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등하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철문은 딱 한번 대화의 중심 소재가 된다. 등굣길에 찢긴 플랜카드와 살짝 열린 문을 보고 학생들은 웅성거린다. 사람들 사이로 오가는 말들은 철거민들을 걱정하는 말이 대부분이다. 마치 그제야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학생들의 따뜻한 걱정 속에서 철거민들의 삶은 어느새 슬그머니 변화의 여지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삶이라 인식된다. 이제 우리는 그들은 확실히 불행할 거라고, 그들은 확실히 삶이 던져 준 고통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믿게 된다. 장면이 몇 번 바뀌고 은희는 영지와 함께 철문 앞을 다시 지난다. 철문과 철거민은 다시금 둘의 대화를 통해 언급된다.


영화 <벌새> 스틸컷 ⓒ 엣나인필름

"선생님 여기 사람들 왜 현수막을 거는 거예요?" 

"집을 안 뺏기려고." 

"남의 집을 왜 뺏어요? 불쌍해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지?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영지가 은희에게 “알 수 없잖아”라고 담담히 말할 때, 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고 동정한 것이 부끄러워지다가, 일말의 안도감을 얻었다.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이 무용한 만큼, 누군가 나의 삶을 상상하는 일 역시 의미 없기에 말이다. 당신은 결코 타인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끝없이 이해하려 하는 일만이 가능할 뿐이다. 당신이 다가가는 만큼 그 이는 뒷걸음질을 칠 테고, 그 이가 다가오는 만큼 당신은 뒤로 몸을 뺄 테니까.


함부로 상상하지 아니하고, 멋대로 동정하지 않는 일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첫 걸음이다. 나와 당신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우리 사이에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한 뼘의 거리가 있다. 그 한 뼘은 종종 상상과 오해로 채워지지만, 그 한 뼘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지켜내게 된다. 한 뼘의 거리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관계는 두 존재를 모두 고통에 빠뜨리고, 종래에는 서로를 떠나게 만드니 말이다. 


상상하고 때때로 오해할지라도 결코 확신하고 재단하지는 않을 것. 감히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은 결국 한 뼘의 거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가 쉴 틈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와중일지라도, 아마 영영 만나지는 못할 거라는 것. 그것을 믿는다, 당신과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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