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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y 20. 2020

태도가 작품이 될 때

우리가 우리에 관하여 말해야 할 때 - 보고 듣고 말하기 #1

중학생 무렵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 뉴스에서 백남준 작가에 관한 전시회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작가의 작품 세계와 의의에 관한 앵커의 설명을 배경으로 아버지는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현대미술은 사기야.” 나는 현대미술이 정말 사기에 불과한지 관심은 없었지만, 어쩐지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현대미술이 사기냐고 다소 공격적으로 되묻는 내게 아버지는 퉁명스레 답했다. “백남준이 그렇게 말했어." 현대미술이 형편없는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 현대미술 작가의 말을 빌려오는 모순이란. 아마도 아버지는 백남준의 그 말을 업계 내부자의 고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 점이 몹시 짜증났지만, 현대미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배경지식도 의지도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동경한다.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의 영사실에 들어가, 영사기 옆으로 난 조그만 창을 통해 관객들을 매혹하는 스크린 속 이미지를 꿈꾸듯 쳐다본다.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면 훨씬 편할 것을 토토는 굳이 영사기 옆에 난 창을 통해 보기를 고집한다. 현대미술이 무엇이라 말하긴 어렵지만, 예술에 관한 창작욕구는 그러한 것이 아닐까 싶다. 구태여 자신만의 창을 찾으려는 행위. 어떤 보상이나 인정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자신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찾고자 하는 욕망. 그와 같은 욕망이 있기에 예술가들은 끝없이 새로운 방식과 새로운 시선을 찾아나서는 것일 테다.


우리가 우리에 관해 말하거나, 나 자신이 나나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같다. 자신만의 창으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관계와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은 고유한 이상향을 좇는 일이니 말이다. 현대미술 작가들이 때때로 대상에 대한 텍스트나 대상의 부재만을 가지고 대상에 대해 말하듯이, 우리는 오로지 부재함만을 통해 우리 스스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때가 있다. 떠나간 사랑·멀어진 이들·아주 잠시 붙들고 있던 감정·찰나의 영감들은 자연의 법칙처럼 우리 곁을 떠나가고, 우리는 이들의 부재를 통해서만 이들이 한때마나 존재했음을 믿게 된다. 동시에 언제고 이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되뇌이며, 간절히 도래를 기원하게 된다. 


박보나 작가는 저서 ‘태도가 개인이 될 때’에서 한겨울 톈안먼 광장에 엎드려 누워 사십 분 동안 바닥에 입김을 부는 송동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M+ Sigg Collection, Hong Kong. By donation, © Song Dong

“송동이 추위를 견디며 입김을 부는 연약한 제스처는 중국의 억압적 정치와 현실이라는 추위에 맞서는 개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중략) 송동과 프란시스 알리스의 퍼포먼스는 생산성과 효율성, 논리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볼 때 쓸데없는 짓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예술로서 이들의 퍼포먼스는 비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은 지점에서 의미가 생긴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곧 사라지기 때문에 더 강한 울림으로 남는다.”



송동은 자신의 입김과, 입김을 감싸는 손을 작가로서 자신만의 창으로 택했다. 그의 입김은 금새 사라지고, 흔적을 남기지 아니한다. 그는 말하기 위해 말하지 않음을 택했다. 아주 잠시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사라져버리는 그와 같은 이들의 시선을 나는 사랑한다. 그것이 종종 사기라고 매도될지라도. 우리에 관해 말하는 불안정한 그 모든 시도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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