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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May 20. 2020

윤희에게

손으로 글을 적어내려가는 일 - 보고 듣고 말하기 #4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을 좋아한다. 누구나 인정하는 악필이지만, 직접 펜을 들고 글을 적어내려 가는 일을 즐긴다. 어쩐지 손으로 글을 쓰는 일은, ‘쓴다’보다 ‘적어내려 가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린다. 손으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개를 아래로 기울여 종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시선 아래로 펜을 잡은 손이 보이고, 그 펜이 가 닿은 종이가 보인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 우리의 손은 시야의 구석에 자리한다. 손은 응시의 대상이 아니라, 그 주변부에 위치한 사물로 기능할 뿐이다. 입력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의 일부가 된다. 


손으로 글을 쓸 때, 우리는 글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우리의 행위를 목도한다. 균일화된 폰트가 아니라, 개인의 필체로 적히는 나의 생각과 마음과 마주한다. 컴퓨터로 글을 쓸 때 우리의 시선은 고정된다. 눈 대신 슬라이드 바를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직접 글을 쓰려면 펜 끝이 움직일 때 그에 맞춰 눈을 좌우로, 위아래로 움직여야 한다. 육필로 글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눈을 움직여 자신의 글을 훑어야만 한다. 직접 글을 쓰는 행위를 설명할 때 ‘쓴다’라는 서술보다 ‘적어내려 가다’라는 서술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자 할 때 손 글씨로 적은 편지를 건네는 행위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육필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영화 ‘윤희에게’에서 편지는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중요한 매체이다. 두 인물은 서로를 향해 편지를 쓴다. 편지 내용은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편지를 읽는 목소리는 편지를 받게 될 이가 아니라, 편지를 쓴 인물의 목소리이다. 글의 내용으로, 육필로도 전할 수 없는 그들의 진심은 목소리를 통해 전달된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컷 ⓒ영화사 달리기 Film Run

“겨울의 오타루는 눈과 달, 밤과 고요 뿐이야”

(중략)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거야.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우리는 매일같이 어떤 마음을 전하고자 글을 쓴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채 진행되는 대화에는 공백이 존재한다. 공백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를 상상하게 한다. 그가 나의 마음을 전해 받고 어떤 생각을 할지, 이 마음이 온전히 전해질 수는 있을지, 상대에게서 답이 올지. 공백은 그 어떤 의문에도 답하지 않는다. 다만 비워져 있을 뿐이다. ‘윤희에게’는 그 공백을 채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아마도 오래도록 이 영화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직접 글을 쓰고 싶게 만든 영화였노라고. 당신에게 보내는 글은 이 영화로 인해 추동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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