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쌓인 것들 - 보고 듣고 말하기 #8
몇 년 전부터 종종 집에 있는 LP판을 듣는다. 전축을 선물 받은 덕분에 생긴 취미이다. 전축을 통해 처음으로 들은 LP판은 서울음반에서 나온 ‘어니언스’의 16집 음반이다. 열일곱 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단연코 타이틀곡인 ‘편지’가 압권이다. 임창제가 작사·작곡하고, 안건마가 편곡한 편지는 바이올린의 독주로 시작한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를 듣고 있자면, 괜스레 마음이 아파지는 노래이다. 가사 역시 여섯 줄에 불과해서 따라 부르기도 편한 노래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손/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위에 곱게 써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멍 뚤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노래 보낸다”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어째서인지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써 고백하는 내용의 노래라고 생각했다. LP는 물론 유튜브 뮤직을 통해 수십 번을 들었는데 말이다. 그러다 최근에 문득 이 노래가 고백이 아니라 이별을 고하는 노래임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가사라고 생각만하고 곱씹어보지 않은 까닭이다. 말없이 건네고 간 편지에는 눈물 자욱이 선명하다. 읽는 이마저 눈물 짓게 하는 이유는 서로 사랑하고 있음에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우는 일 뿐이기에. 떠나갈 수밖에 없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사랑했노라, 더없이 사랑했노라 홀로 되뇌는 일 뿐이기에.
이 노래는 1973년도에 나왔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니언스 16집은 1983년에 나왔다. 1964년생인 내 어머니가 스무 살에 산 이 앨범을 보고 있으면, 그의 젊은 날이 어떠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에게도 스무 살이 있었구나, 나온 지 십년도 더 된 노래를 들으며 어떤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혹 본인이 직접 산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은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는 내 어머니에게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은 사랑한 사이였을까, 이들의 추억은 먼지 쌓인 LP판처럼 오래도록 간직 되었을지.’
겪지 않은 슬픔과 상념에 빠진 채 노래와 함께 헤매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소설의 문구가 있다. 1970년생의 독일 작가 유디트 헤르만의 ‘붉은 산호’라는 단편 소설의 문장이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리 치료 상담을 받았고, 그 때문에 붉은 산호 팔찌와 내 애인을 잃었다. 붉은 산호 팔찌는 러시아에서 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페테르부르크산(産)이고 백 년도 넘은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팔찌를 왼쪽 손목에 차고 있었고, 증조할아버지는 그 팔찌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인가? 잘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붉은 산호 팔찌를 두고 삼 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풀어낸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 자신이 겪지 않았고, 잃지 않았으며, 마음에 품은 감정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내 몸의 피를 따라 흐르는 것만 같은 상실감과 비애를 느낀다. 먼지 쌓인 LP판을 보고 있자면, 지나간 생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만난 적 없는 그들을, 알지 못하는 그 이들을, 그래서 자꾸만 상상하게 되는 찬란한 삶의 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