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정의 기록 Jun 03. 2020

판타지랜드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시대 - 보고 듣고 말하기 #9

스코틀랜드 출신의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G.Frazer)는 평생의 역작 「황금가지」로 인류학, 민속학, 신화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죽은 그는 기독교를 원시 신앙과 종교의 연장선상에 놓고 분석함으로써, 서구 기독교인들이 미개하다고 손가락질한 비기독교 문명의 토착 신앙의 근본 작동 원리가 기독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던졌다. 물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프레이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역시 농경 문명이 공유하는 테마라고 바라보았다. 농경 문명에서 신성한 자는 신성하기에 살해당한다. 그리고 부활한다. 세트에 의해 육신이 갈가리 찢긴 오시리스는 이시스 손을 거쳐 꿰 맞혀진 육신으로 되살아난다. 제우스는 티탄에게 잡아먹혀 심장만 남은 제 아들, 디오니소스를 딱하게 여겨 연인인 세멜레의 자궁을 빌려 그를 부활시킨다. 프레이저에게 있어 이 모든 이야기는 눈보라와 함께 들이닥친 죽음 위에서 새 생명을 피워내는 식물의 생명력을 형상화한 이야기이다. 



The Golden Bough,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834


어떤 농경 문명은 대자연의 순환을 돕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인신 공양도 펼쳤다.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광신도들은 환희에 가득 차 자신의 몸을 바치기도 했다. 고대 문명에 있어 주술은 매우 합리적인 체계였다. 현대인들이 자동차에 집어넣을 석유를 시추하기 위해 지구 곳곳에 구멍을 파고 있다면, 고대 아스텍인들은 태양이 꺼지지 않도록 인간의 몸을 파헤쳐 심장을 파냈을 뿐이다. 프레이저는 고대인들의 주술을 크게 동종 주술과 감염 주술로 분류하였다. 고대인들은 사람과 형상 사이에는 공감 관계가 있으며, 한번 접촉한 대상은 설령 단절되더라도 공감 상태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저주하고자 하는 이의 사진에 못을 박는 행위가 바로 동종 주술이다. 저주 대상의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모아 인형에 넣어 못을 박는다면, 감염 주술이 더해진 주술 행위이다. 놀랍게도 이런 주술적 사고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문명화된 자신들을 고대인들과 분리하여 사고한다. 정말 그럴까?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병원이 병을 만든다거나 인체의 자가 치유력을 일깨운다면 암도 이긴다는 미심쩍은 주장을 펼치는 소위 대체의학 전문가들은 공공연히 지상파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이론(?)을 설파한다. 그들이 말하는 동종요법에 근거한 이론은 동상에 걸린 발을 얼음물에 담그는 식의 근거 없는 민간요법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해 의학 정보로 둔갑하여 유통된다. 그뿐인가. 아직도 마시기만 해도 질병을 유발하는 ‘활성산소’를 제거하여 아토피, 치매, 당뇨, 호흡기 질환, 심지어는 숙취(한국인이라면 혹할 수밖에 없다)에도 효능이 있다는 ‘수소수’가 웰빙 시대의 잇템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주술적 사고는 비단 의학만 관련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제1 야당의 당수이자 전직 총리였던 황교안 씨는 춘천한마음교회에서 자신의 총리 재임 시절인 2015년, 극심한 가뭄을 해결하고 사람들과 기도를 시작하였더니 2주 뒤에 비가 내리더라고 간증하였다. 천국은 빛의 속도로 대략 2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국가 비상 상황 시 시민이 공무원에게 기대하는 일은 기원이나 기도가 아니라 매뉴얼에 따른 대응일 텐데 말이다. 고려 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무당이 흙으로 용의 형상을 빚어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취무도우(聚巫禱雨)를 지냈다. 프레이저의 분류에 따르면 이 역시 일종의 동종 주술인 셈이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말에 비하면 다소 강렬함이 부족하긴 하지만, 기도를 통해 비를 불러왔다는 주장은 주술적 사고에 근거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 관련하여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연 이만희 신천지 총회장 ⓒSBS

이는 특정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리고 이전보다 더욱더 강렬한 주술적 환상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 명동 거리에는 베리칩이 짐승의 표식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두고 매일같이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천부교, 제칠일안식일, 하나님의 교회 등 수많은 대형 교파들이 저마다의 재림예수를 섬기고 있다. 태극기 부대는 공산주의자가 대통령 자리를 불법으로 탈취하여 나라를 이북에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정치 이념에 상관없이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남성들을 역차별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북한 인민군의 조직적 개입에 의한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현직 국회의원의 추천으로 토론회를 열기도 한다. 음모론의 핵심은 무엇이 진실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음모의 일부라고 지목된 이들이 반박하는 순간, 그들은 음모론자들의 프레임에 갇힌다. 입증의 책임은 지목된 이들에게 있으니 말이다. 괴벨스가 시온의정서를 두고 이야기한 것처럼, 음모론은 핵심은 그것을 진실 여부가 아니라 그것의 활용가치에 있다. 반지성주의와 결합한 음모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리려 하지 말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라고 부추긴다. 뉴미디어의 등장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이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력을 키우는데 매우 적합한 토양을 제공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유저가 특정 주제를 검색하면 더욱더 자극적인 영상을 추천하게끔 짜여 있다. 유저가 플랫폼에 오래 머무를수록 광고에 길게 노출될 테니 말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 청교도들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광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재림 예수께서 자리할 천년왕국을 건립하고자 신대륙으로 떠났다. 그들은 몇 가지 걸림돌, 예를 들면 전염병과 굶주림 무엇보다 이교도 원주민들을 말살하면서 신생 국가의 기틀을 다잡았다. 미국은 건국 이래 끊임없이 온갖 음모에 집착하는 편집광들에 시달려 왔다. 종말, 마녀, 노예제, 일루미나티, 나치, 공산주의자, CIA, 프리메이슨, 세계 정부에 이르기까지 음모의 주체는 모습과 이름만 달라졌을 뿐 늘 존재해 왔다. 코믹스의 빌런과 히어로의 관계처럼, 정부와 엘리트 계급이 은폐하려고 했던 음모를 파헤치는 선구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음모를 필요로 했다. 물론 선구자들이라고 다 의견이 같지는 않았다. 미국은 누구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는 나라이니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판타지랜드, 커트앤더슨 ⓒ세종서적

커트 앤더슨은 저서 「판타지랜드」에서 (미국)사회가 어떤 과정을 통해 급속도로 판타지랜드로 개조되었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앤더슨이 예시로 들고 있는 많은 사례가 대한민국에서도 유사하게 나 타고 있다. 미국의 지원 아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 대한민국은 미국적이라면 무엇이든 간에 열광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앤더슨이 언급한 대표적으로 판타지랜드의 토양을 마련한 교파에 소속된 교회라는 사실에는 분명한 시사점이 존재한다. 이적과 은사, 방언을 중시하는 오순절주의가 한국에서 큰 세를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의료체계 불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존 의료체계를 따르지 않고 대체의학을 바탕으로 육아를 해야만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안아키라 단체만 비난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그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그 욕망이 어떤 방식과 짜임새로 대안 현실을 만들어냈고, 누가 그것을 유통하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 삶의 불안함과 불안정에 지친 개인들은 흔히들 거대 서사에 자아를 위탁한다. 거대 서사는 종교적 메시아일 수도, 정치적 혁명가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존재하였던 시절, 혹은 그들이 재림할 미래의 순간에는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기만 하더라도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공포는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 자신과 동일한 것을 참을 수 없어 한다. 현실은 나와 너무 바투 붙어 있다. 현실의 지난함이 크면 클수록 판타지랜드의 유혹은 달콤하다. 진실이나 진리가 아니라 네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라는 반지성주의의 프로파간다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짧은 단평으로 명성을 얻은 영화 평론가 이동진 씨가 봉준호 감독의 신작 「기생충」에 관한 37자짜리 한 줄 평을 게재하였다가 거센 비난을 받은 일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명징’과 ‘직조’가 정말이지 일반적으로 어렵다고 느낄만한 수준의 단어인지를 가리는 일은 부차적인 일이다. 문제의 본질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영화 평론가라면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는 대중적 요구와 인식에 있다. 모두가 팩트를 말하고, 모두가 전문가를 자처하며, 모두가 강렬한 자기 환상에 사로잡힌 시대인 것이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스틸컷

냉전을 다룬 히치콕 감독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인물들은 확증 편향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소련과 미국은 서로가 자신을 파멸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들의 의심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인물들에게 한 인물이 일갈한다. 


“여러분, 이 안에서 싸워선 안 되오, 이곳은 전쟁 지휘소란 말이오!” 

“Gentlemen, You can't fight in here, this is the War Room!” 


판타지랜드라는 각축장의 아이러니를 이보다 잘 설명하는 문장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니언스,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