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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n 03. 2020

나, 다니엘 블레이크

증명될 수 없는 삶이란 - 보고 듣고 말하기 #10

언어는 이미지를 동반한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언어는 그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문화 속 고정관념에 곧잘 수렴한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가난, 질병, 기초수급자, 곤란한 생계, 노모와 어린 아들을 둔 삼십대 남성. 당신은 아마도 남루한 행색을 한, 자신 없는 태도와 어리숙한 말주변을 가진 사내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상상 속 그 이는 순박하고, 작은 도움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일거라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제 분수를 모르고,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사회부적응자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쓴 한 부자(父子)에 관한 이야기다. 뉴스가 나가고 그들을 향한 후원이 이어졌다. 세상이 아직은 살만하다는 미담이 퍼진지 며칠 되지 않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알고 보니 사내가 불성실하고,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아 온 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사내는 미담의 주인공에서 분노의 대상으로 처지가 바뀌었다.


가난은 언제나 증명을 요구받는다. 정말 도움 받아 마땅한지 말이다. 얼마나 사정이 절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해진 조건과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가난은 도움 받을 수 있는 가난이 될 수 없다. 때때로 가난한 이는 경제적 여건 외의 것조차 증명하라 요구받는다. 앞서 이야기한 사내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여러 사람들의 진술을 모아봤을 때 사내는 도벽과 거짓말, 무책임한 태도를 지닌 인간으로 보인다. 허나 이 진술만으로 사내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걸까. 진실과 거짓은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뚜렷이 나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은 도움 받을 만한 이들과 도움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는 도움 받을 만한 기준을 만족하느냐가 아니라, 그 기준을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야 한다. 슬프게도 도움 받을 자격은 가리는 기준은, 일평생 남의 도움을 받을만한 상황에 처해 볼 일이 없는 이들이 만든다. 가난에는 모멸과 부끄러움이 들러붙는다는 걸, 때로는 가난 자체보다 그 모멸이 사람을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노년의 목수 다니엘과 미혼모 케이티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암전된 스크린을 배경으로 질병 수당 자격 심사관과 다니엘의 대화를 2분 20초 동안 들려준다. 관객은 매뉴얼에 따른 심사관의 기계적인 문답을 잠자코 들어야만 한다. 다니엘이 겪어야 할 숱한 어려움은 그 2분 20초의 통화로 인해 펼쳐진다. 심장마비로 오랫동안 해 온 목수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절실히 필요로 하지만, 3점 차이로 수당 지급을 받지 못한다. 다니엘은 1시간 48분을 기다린 끝에 콜센터 상담원에게 항의를 표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보험 심사관의 전화를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케이티의 사정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매일 수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며 청소 전단지를 뿌리지만,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제 자신은 밥을 굶기 일쑤이다. 그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리기까지 한다. 영화 말미에도 다니엘과 케이티의 사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어려워진다. 다니엘은 질병 수당에 이어 구직 수당 신청마저 기각 당하고, 생계를 위해 대다수의 살림살이를 팔아넘긴다. 케이티의 큰 딸 데이지는 가난을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고, 케이티는 생계를 위해 매춘에 나선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영화는 다니엘의 글이 낭독되며 끝난다. 그 누구라도 그의 삶은 결코 완전히 증명될 수 없다. 자격을 증명하라 요구하는 숱한 서류로도 삶은 결코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담을 소비하며 무엇이 증명되기를 바랐는가. 이야기 속 사내의 삶이였는가, 아니면 우리가 바랐던 행복한 결말이었는가. 우리는 사내의 삶을 바라보며 무엇이 증명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사내가 실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를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정의의 구현인가. 왜 분노와 단죄는 아래로만 향하는가. 누군가의 자격을 따지기에 앞서 자격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묻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모든 수당 신청을 포기한 다니엘은 센터를 나와 벽에 스프레이로 글씨를 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고 말이다. 경찰에 체포되는 그를 향해 시민들은 연호한다.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너희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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