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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n 08. 2020

베스트 오퍼

 가지지 못한 것 - 보고 듣고 말하기 #12


컬렉션의 완성은 이미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아직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달려 있다. 가지지 못한 자는 언제나 고통 받는다. 1개를 가지고 있든, 100개를 가지고 있든.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번뇌에 휩싸이고, 가졌다 착각한 것으로 인해 파국을 겪는다. 베스트 오퍼는 가진 것 위에 앉아 가지지 못한 것을 탐닉하다, 가졌다 오인한 것으로 인해 절망으로 내몰린 이에 관한 영화다.


버질 올드만은 전설적인 미술품 경매사이다. 그의 진가는 작품을 파는 게 아니라 작품을 알아보는 데 있다. 뛰어난 심미안 덕분에 그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먼지 쌓인 나무판자를 가져다가, 아름다운 작품으로 복원하기도 한다. 버질은 판자에 쌓인 세월의 더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이다. 대중에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작가의 작품에 담긴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예민하고 날카로운 이다. 


미술품과 달리 타인은 그에게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버질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연인·친구들과 함께 온 이들로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그는 홀로 식사를 한다. 장갑을 낀 채로. 오랫동안 만나온 이와 대화를 하면서도 버질은 장갑을 끼고 있다, 고집스레. 외출을 준비하며 수십 켤레의 장갑 중 어떤 것을 낄지 고민하면서도 그는 흰 장갑을 끼고 있다. 버질에게 있어 타인은 미지의 영역이다.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대상.


버질은 여인을 그린 초상화들을 모은다. 대리인을 내세우는 불법을 동원하면서까지 말이다. 수백 점에 달하는 그의 컬렉션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림을 보관해둔 방은 심지어 출입문이 금고이다. 천장이 높은 방의 모든 벽은 그림으로 뒤덮여 있다. 방 안에 놓인 가구라고는 일인용 소파와 소파 테이블뿐이다. 영화 속에서 버질은 홀로 소파에 앉아 컬렉션을 감상한다. 영화 초반 버질이 수백 점의 그림을 볼 때,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함에 만족하며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영화 <베스트 오퍼> 스틸컷

"모든 위조품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다." 무슨 뜻이에요?

작품을 위조할 때도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유혹에 저항하지 못해. 사소한 디테일이나 터치를 다르게 해서 결국 불가피하게 본분을 저버리게 되지. 자기 표현의 정신, 그게 진품의 감성이야. 


평생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 없던 버질은 클레어라는 미스테리한 여인에게 마음을 뺏긴다.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버질은 클레어와 식사 자리에서 위조품에 담긴 진품의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작을 만드는 와중에도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감출 수 없기에 모든 위조품에는 진품의 미덕이 깃들어 있다는 말은 훗날 그가 겪을 상실감을 예고한다. 클레어와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면서 그는 고뇌한다, 자신을 향한 클레어의 사랑에 대해. 홀로 남겨진 버질은 클레어의 말을 곱씹는다.



영화 <베스트 오퍼> 스틸컷

버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 사랑하는 내 마음 알아줘요.  


자신이 가졌다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을지. 자신이 가지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는 이제 장갑을 끼지 않는다. 손잡고자 했던 이를 기다리며, 홀로 앉아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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