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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n 08. 2020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그냥 그런거지 뭐 - 보고 듣고 말하기 #11

예술가가 나오는 소설이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글을 쓰는 인물이 나온다면 더더욱. 제목이 긴 소설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형성된 버릇이다. 쓸데없이 말을 길게 늘이는 대사는 좀처럼 좋아할 수 없다. 예컨대 방금 내가 ‘안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좋아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못된 버릇이다. 소설이란 무엇일까. 새벽을 보내며 생각하기에 알맞은 주제이긴 하지만, 게으른 탓에 예전에 써뒀던 글을 뒤적여 본다.


“가까스로 보이는 것이 있다. 삶의 가장자리에 붙박여 있지만, 애써 보려 해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두 눈을 크게 뜨고 보기보다 가늘게 뜬 실눈으로 보아야 어렴풋이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 보통 삶을 괴롭히는 건 그런 것이다. 내밀하고 모호하여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에게도 좀처럼 설명할 도리가 없는 실루엣 말이다. P씨는 자신의 실루엣을 설명하고자 욕망했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구병모 작가의 「어느 파씨주의자의 종생기」라는 소설에 대한 비평문에서 썼던 문단이다. 소설 역시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가까스로 보이다가 이윽고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작가의 진술, 끝끝내 실패하고야 마는 욕망. 예정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쓰고 지우고, 어떤 이는 이에 더해 말이나 질질 늘이고 젠체하는 뭐 그런 것.


문학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향하는 이들을 사랑한다. 그이가 더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어깨를 움츠리고 다가올 운명에 비탄 젖은 한숨을 내쉬든, 소설은 그 모든 실패를 소중히 모아 독자에게 내보인다. 고귀한 자가 파멸에 이르는 것이 비극이라면, 보잘 것 없는 범인이 맞이하는 파멸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문학동네

자신의 입봉작이 술이나 먹고 섹스나 하는, 홍상수 영화 짝퉁이나 다름없다는 모욕을 듣자, 고매하신 선생들이 함께한 술자리를 뒤엎어 버리던 주인공은 어느덧 서른 중반을 맞이한다. 그는 여전히 술 마시고 섹스하고, 영영 대책 없이 살 것처럼 굴지만, 그는 상대에게 뼈아픈 모욕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단단한 등과 빛나는 광대를 가졌던 왕샤 역시 이제는 무용수보다는 생활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내가 되었고.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잠든 근육청년 탐하기」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며 저작권을 위반한 이들을 찾아야만 하는 지리멸렬함은 주인공이 감내해야 할 파멸로 온당할 것일까.


사오 년 전쯤 현시창이란 줄임말이 유행했다. ‘시궁창’ 외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란 보편적이기에 어딘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는 법이다.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현실마저 처참히 파멸하고 갈가리 찢기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 처참한 실패는 위대한 성공과 비슷한 구조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클라이맥스라도 있으니까. 그와 비슷한 내용의 소설과 영화를 몇 작품을 꼽아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책장이 덮이면 끝나는 소설과 달리 현실 속 삶은 이어진다. 구질구질해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주인공과 왕샤도 우리가 덮은 세계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니까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가겠지. 그들이 이번 생은 글렀다는 체념을 조소와 술기운의 힘을 빌려 조금씩 날리며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어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골똘히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가 처음 쓴 문장은 무엇이었을지 말이다. 이 소설의 경우 높은 확률로 “닥치세요 씨발.”이 아닐까 싶다.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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