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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n 13. 2020

예수전

다시 보는, 성탄 - 보고 듣고 말하기 #13

전국 방방 곳곳을 순회하며 외세의 압제에 저항하고 지배계급의 수탈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지자를 모으던 서른을 갓 넘긴 사내가 있다. 사내의 고향은 갈릴래아 지방이다. 갈릴래아 지방은 요르단 강의 수원이기도 한 갈릴래아 호수를 끼고 있는 풍요로운 곡창지대이지만, 지역민들은 예루살렘의 귀족과 로마 제국의 수탈에 고통 받아야만 했다. 고위 제사장 직위를 독점하던 사두가이파는 민중들의 이런 현실에는 눈감은 채 율법에 복종하라 강요하였다. 


가난과 차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의 저항의식은 늘어만 갔다. 끊임없이 소요와 봉기가 일어났고 대개의 갈릴래아 청년들은 과격한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고 또 죽어 갔다. 예수는 바로 그런 참혹한 현실 속에서 성장했다. - [예수전], p22-p23


성서학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 시점을 기원전 4년에서 기원후 5년 사이로 추측한다. 당시 시리아 총독은 로마에서 파견된 퀴리니우스였다. 누가복음에는 아우구스트 황제의 명령을 받은 퀴리우스 총독이 유다 지방에 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갈릴래아 지방에서 봉기가 일어난다. 갈릴래아 지방을 대상으로 한 인구조사가 아니었음에도 로마와 예루살렘의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가 터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기득권 세력은 갈릴래아 지방을 제롯당의 근거지로 바라보았다.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갈릴래아 지명은 반역의 대명사였다. 예수가 태어난 고장은 반골로 가득했다. 조선 땅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이래 가장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고 커졌던 지역은 함경도였다. 함경도 역시 조선왕조 내내 반역과 오랑캐의 땅으로 불리며 천시 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1910년 함경도 경성군에서는 지역민과 기독교인, 선교사들이 힘을 모아 명분 없는 세금 수취에 대해 조세 불납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시간과 공간이 다를지라도 수탈당하는 민중의 모습은 변함없이 동일하다는 점이 씁쓸하다.


예수전, 김규항 ⓒ돌베개

<40 그리고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선생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41 그러자 예수께서는 측은히 여기시고 당신 손을 펴 그를 만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시오" 하셨다.> …(중략)... 그의 분노 역시 애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이 자연스레 그들의 고통을 낳는 사람들과 사회체제에 대한 강렬한 분노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 [예수전], p37~p39 


예수전의 저자 김규항에 따르면 위의 ‘측은히 여기시고'라는 대목을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스플랑크니조마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창자와 내장을 뜻하는 명사 ‘스플랑크논'의 동사형인데, 이를 한국어로 직역하자면 그리스도는 나병환자를 보고 애끊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심정이 한국어로 곧장 읽히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지만, 병들고 가난한 이를 신의 저주를 받았노라 천대했던 고대에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나병환자를 대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일 것이다. 애끊는 마음은 자연스레 그 고통을 낳은 이들에게로 향한다는 저자의 말은 지당하다. 종교의 본위는 약자와 고통 받는 자를 향한 연민과 연대에 있다. 세속적인 아픔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세속적인 권력과 결탁한 종교는 필연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예수전에서 즐겨 인용하는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라다녔던 추종자 무리를 ‘오클로스'라고 말한다. 원로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이 ’오클로스'가 죄인으로 천대 받았으나 죄사함을 받은 민중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인들에게 멸시와 모욕을 받던 세리와 함께 밥을 먹고 어울리는 모습은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메시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대의 기독교인과 성서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위해 그리스도의 혈통을 다윗 왕에게 찾는 동시에, 제사장 가문 출신의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 그가 선지자의 자리에 오른 기름부음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살아생전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은 권위는 그의 소탈한 모습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권위를 혈통이나 누군가의 점지가 아니라, 당대 가장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율법을 거리낌 없이 비판한 그의 모습에서 찾아야만 그리스도를 향한 당대 이스라엘 민중들의 열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서 사고파는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환전상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누구든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 17 또한 가르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집은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18 마침 대제관들과 율사들이 듣고서는 이떻게 그분을 없애 버릴까 하고 궁리했다. 사실 그들은 그분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군중에 모두 그분의 가르침을 매우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민중이 신에게 바칠 제물을 수십 배의 값으로 팔아 폭리를 취하는 이들을 성전에서 내쫓는다. 더 나아가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전락했노라 선언한다. 제사장의 지위를 독점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였던 지배계급에 있어 이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신에게 다다르는 데 있어 성전과 재물은 필요 없다는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주장은 훗날 루터에 의해 다시 말해진다. 휘황찬란한 성당과 근엄한 주교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과 기도만으로 신에게 이르는데 충분하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곱씹어 봐야한다. 응당 당대 지배계급은 그리스도의 이 불온함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체제의 근간을 뒤흔든 그리스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되었다. 



1 그리고 즉시 새벽에 대제관들과 원로들과 율사들과 함께, 그러니까 온 의회가 결의하여 예수를 결박하고 압송하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 2 빌라도가 그분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왕이오?” 하고 묻자 그분은 그에게 대답하여 “당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하셨다


포박된 그리스도에게 총독이 묻는다, 당신이 그 반역자이냐고. 그리스도는 이 질문에 모호하게 답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에게 있어 왕은 군림하고 통치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민을 섬기는 자리이기에 그리스도가 이와 같이 대답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진의가 저자의 주장과 일치하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모든 목회자들이 교인과 민중을 대하는 태도는 분명 그러해야 할 것이다.


40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41 그들은 그분이 갈릴래아에 계셨을 때 그분을 따르면서 그분의 시중을 들었었다. 또한 그분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그의 옆에는 여성 제자들이 있다. 그리스도가 가장 비참한 순간을 함께하고, 그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이는 그가 가장 높이 세운 이인 베드로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다. 저자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당대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 하였기에, 가부장제의 억압으로 고통 받았던 여성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에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베드로가 초대 교황에 이른 이래 그와 같은 역사는 잊히고 오늘날도 여성이 목회자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여전히 논란이다.


크리스마스에 김규항의 예수전을 꺼내들고 묻는다. 복음은 어디에 있는가. 성탄은 누구를 위해 기리는가.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이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토로하던 그리스도의 정신은 여전히 불온하다 여겨지지 않는지. 서울의 밤을 밝히는 네온 십자가 아래 드리운 그림자는 자꾸만 넓어지는데, 우리는 무엇을 성탄이라 부르고 있는가. 이천년 전 세상을 살다간 서른살 사내의 육신일지, 그가 세상에 남긴 애타고 비통한 마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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