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정의 기록 Jun 13. 2020

세실, 주희

환대의 가능성 - 보고 듣고 말하기 #14

“기어코 불행은 일상의 리듬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행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누구든 그것과 대면하는 일은 언제나 고역이다. 그리하여 대체로 불행이 찾아들 때 우리는 입안의 것을 삼키지도 내뱉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쥐스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욕망하는 여자들>-로우, 박경섭 


불행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우리를 처참히 물어뜯는 것일까. 때때로 삶은 우리에게 놀라운 악의를 선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에게 평온함을 뒤흔들고 절망을 선사하는 것이 누군가의 악의 없음일 때가 있다. 다행히도 인간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불행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 사람에 따라 그 정도는 다르지만. 동시에 그런 이유로 우리는 타인에게 닥친 지독한 불행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 정도는 누구나 참고 넘기는 것 아니냐고, 왜 저리 유난인지 모르겠다는 모진 말을 아무 죄책감 없이 내뱉는다. 적어도 그런 말을 내뱉는 이를 방관하거나.


놀라운 사실은 아무리 크나큰 불행일지라도 익숙해지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원래 나와 함께 했던 것처럼. 이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 되뇌며 살게 되기도 한다. 예컨대 주희가 자신의 얼굴을 한 포르노 사이트에서 찾은 일이 그러하다. 익명의 여성의 얼굴과 전라가 매대에 진열된 상품처럼 내걸린 사이트에서 주희는 자신에게 어째서 이와 같은 불행이 들이닥쳤는지 알 수 없다. 그저 평범한 하루였던 순간이 지옥으로 변한 일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마음이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J의 배려 없음이, 혹은 나 자신의 부주의함이 문제였다고 책망한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적어도 남들처럼 가슴은 보이지 않았으니, 섹스하는 장면이 찍히지는 않았으니 되었노라 넘어가야 하는 걸까. 주희는 이 거지 같은 선택지들을 뒤로하고 메일을 쓴다. 얼굴을 내려달라고. 그러나 부탁이라고 덧붙여 말이다. 


불행은 강요된 러시안룰렛과도 같다. 세실과 주희는 직장 동료이자 또래 여성인 동시에 식민지배국과 피지배식민국이었던 국가의 시민이다. 세실은 주희를 꿈꾼다. 주희가 J를 꿈꾸었던 것처럼.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는 세실에 부탁에 주희는 그의 한국어 교사가 된다. 주희는 세실에게 내준 작문 과제를 통해 세실의 불행을 조금 엿본다. 가난하여 기가 죽어 다니는 아이에게 너의 할머니는 히메유리 학도대 출신의 위대한 전쟁 영웅이었다고 말해주며 등을 토닥였을 세실의 어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 이야기로 세실의 불행은 조금이나마 덜해졌을까. 불행과 관련된 가장 끔찍한 일은 삶에 관한 의지와 열망을 불행에서 찾는 일이 아닐까.


세실은 주희의 불행을 알지 못한다. 주희는 세실을 불행을 조금은 알지만 다 알지는 못한다. 세실은 자신이 주희에게 건넨 화장품이 한국인들이 꺼리는 우익기업이자, 얼마 전 대량 리콜 사태가 있었던 회사의 제품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그 사실은 면역된 불행이니 말이다. 태평양 전쟁이라는 참상을 영웅 서사로 포장할 수 있는, 타인의 전라를 보며 즐거워하는 악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지극히 구조적이다.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괜찮아요, 세실 상. 이건 평화로운 집회에요. 전쟁 피해자들을 위한 집회에요.”

세실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나도 중학교 때부터 반전 집회에 참여했어요, 일본에서. 우리 할머니도 전화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주희는 기분이 이상해져 세실을 돌아봤다. 세실을 멀리 있는 것을 보려는 듯 발돋움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주희는 세실을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실, 당신의 할머니와 여기서 말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조금 달라요…… 세실의 할머니는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면서요……

(중략)

J는 미국인 남자애들과 우르르 일어서며 주희에게 피곤하면 안 가도 돼, 여기서 좀 더 마시고 있어, 라고 말했고, 주희는 아니, 따라가고 싶어, 대답했다. 따라가고 싶어. 그 말을 했던 자신을 생각해내자 비참해진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르디 그라, 참회의 화요일이 육박해오는 순간이었다. 행렬은 어느덧 소녀상 근처에 도착했고 세실은 동상의 의미를 몰랐다.


누군가 그 악의에 삶의 목적을 두고 타인의 아픔을 짓밟고 희열을 느낄 때, 그 저변에는 그 악의를 만들어낸 구조가 자리한다. 마그나 카르타를 맞이하여 회개해야 할 이는 누구일까.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환대할 수 있는 걸까. 다만 맞잡을 손이 있다면 붙잡고 걸어가기를 바란다. 주희는 세실을 손을 붙들고 인파 사이를 지나갔을까. 영문을 알 수 없을 세실의 손을 잡아줬다면, 부디 그러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수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