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정의 기록 Jun 15. 2020

스윙키즈

불행이 우리를 응시할지라도 - 보고 듣고 말하기 #15

불행에 관하여 한 번 더 쓴다. 불행에 관해 쓰되, 불행에 관해 말하지는 않으려 한다. 불행이 우리 앞을 서성일 때, 불행이 우리의 궤적을 좇을 때, 불행이 우리를 먹어치우려 할 때에 우리는 겁에 질린 나머지 우리 안과 밖에 찾아드는 삶의 소중한 순간을 놓치고는 한다. 일상이 온통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해 보이더라도 일상은 지켜낼 가치가 있다, 언제나. 그곳이 설령 전쟁포로수용소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스윙키즈는 1951년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약 15만 명의 인민군과, 2만 명 남짓의 중공군 포로들이 붙잡혀 있었다. 철책과 삼엄한 경비로 외부세상과 단절되었지만,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가장 치열한 전선 중 한 곳이었다. 대한민국으로 귀순을 택한 반공포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송환을 요구하는 친공포로 진영 간의 대립은 곧잘 살인과 테러로 이어졌다. 도대체 이 전쟁이 왜 벌어졌는지, 어째서 철책 안에 갇혀서도 지긋지긋한 싸움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누구하나 명확히 설명해주지 못하지만. 


열여덟 살의 기수는 전쟁 전에는 촉망받는 무용수였다. 서글서글한 성격과 전쟁 영웅인 동생 로기진 덕분에 수용소 내 친공포로 진영에서 사랑받는 인물이다. 남들과 크게 다를바 없던 로기수의 일상은 탭 댄스를 알게 되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탭 댄스 팀을 꾸리는 잭슨 하사에게 깜둥이 양코배기가 펼치는 악랄한 협잡에 불과하다고 시비를 걸던 그는 어느새 탭 댄스의 리듬과 비트에 빠져든다. 빨래 방망이 소리나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에서도 기수는 탭 댄스를 떠올린다. 수용소 온 사방이 탭 댄스의 비트로 가득하다. 바야흐로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 나이대 청년들이 그러하듯. 세상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다. 그의 안전을 걱정하여 탭 댄스 팀에 참여하는 걸 만류하는 잭슨 하사에게 로기수는 말한다.


영화 <스윙키즈> 스틸컷 ⓒ(주)안나푸르나필름

“아이 완트 쟈스트 땐스”


웃음을 팔든 지푸라기를 꼬든 어떻게든 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양판래, 브로드웨이 탭 댄서였지만 전쟁에 끌려온 잭슨 하사, 민간인이지만 인민군으로 오인 받아 수용소에 끌려와 아내와 생이별 한 강병삼, 누구보다 춤을 사랑하는 샤오팡, 그리고 로기수. 그들이 수용소 포로들 앞에서 펼치는 춤의 제목은 간결하다. 


“Fuck Ideology.”


춤을 출 때 이데올로기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인종이나 성별, 국적이나 진영 같은 건 따질 필요가 없으니까. 탭 댄스 슈즈를 든 판래는 말한다.   


영화 <스윙키즈> 스틸컷 ⓒ(주)안나푸르나필름

“이 신발을 신으면 전쟁이건 생계건 불행한 상황이건 아무 걱정 없어져.”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일지라도 기수에게는 무대와 동료들이 있다. 발을 놀리고 팔을 휘둘러 제 몸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가득 채울 수 있는 무대가, 함께 거친 호흡을 내뱉고 땀방울을 흘리는 동료들이 있다. 포화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 죽음의 위협이 이어지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은 존재한다, 언제나. 당신은 당신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불행이 우리를 응시할지라도, 우리는 꿈꾼다. 당신을 위한 무대가 저기 바로 앞에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실, 주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