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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정의 기록 Jun 15. 2020

차갑고도 푸른

아무 일도 없었기에 - 보고 듣고 말하기 #16

무어라 단정지어 말하기 애매한 순간이 있다. 분명 어떤 감정이 싹텄는데, 이를 입 밖으로 꺼내면 그것이 사실이 될까 두려워지는 순간이. 그 애매모호함은 우리를 흥분시키기도, 속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야심찬 작가들은 그 지점을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로 완성해낸다. 유디트 헤르만은 독자에게 갈증과 흥분을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을 아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 '차갑고도 푸른'은 소설집 「단지 유령일 뿐」에 수록된 단편 소설이다.


요니나는 아이슬란드 인이다. 여행 가이드인 그는 딸 수나와, 연인 마그누스와 함께 산다. 일상의 리듬은 마그누스의 독일인 친구가 아이슬란드를 방문하면서 달라진다. 젊은 시절 아이슬란드를 떠나 십년 간 베를린에서 지냈던 마그누스는 연이어 닥친 불행으로 아이슬란드로 돌아온다. 이레네는 마그누스가 베를린을 떠나기 며칠 전, 좌절의 아픔에 허덕일 때 손을 내밀어 준 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한 동기와 배경을 갖춘 관계지만, 사랑으로 발전하기에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요니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레네가 오는 사실을 말할 기회가 한 달이나 있었음에도, 오기 며칠 전에야 요니나에게 이레네의 방문을 알렸으니 말이다.


이레네는 자신의 친구 요나스와 함께 아이슬란드를 방문한다. 그 둘은 연인 관계는 아니지만, 둘 다 이전의 사랑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이레네와 요나스 역시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동기와 배경은 충분한 셈이다. 실타래처럼 엉킨 이들의 관계에 요니나가 끼어든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요나스를 인해 요니나는 흔들린다.


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민음사

요니나는 12월 3일 오전 11시 직전 옛 싱 광장으로 향하는 거리에서 요나스에게 반했다. 그렇게 됐다. 그즈음에는 10시와 11시 사이에 날이 밝는다. 한 시간 동안 하늘은 섬뜩할 만큼 진한 푸른색으로 빛나는데, 마치 모든 세상이 화해하는 듯한 빛깔로 십 분간 그렇게 있다가 흐릿해지면서 사라진다. (중략) 10시 47분이고 그 순간 요니나는 요나스에게 반했다.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얼음지치기를 하며 사진대로 돌아간 그 순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걸 묻는 건 소용이 없다. 그건 그런 것이고, 마치 요나스의 불필요한 피부가 벗겨져 그 아래로 요니나가 사랑하길 원하는 피부가 나타나는 듯했다. 요니나가 마그누스에게 품고 있던 가멍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요나스에게 슬쩍 넘어간다. 새털같이 가볍고, 분명하고, 아픔이 없는 채로. 이게 바로 끔직한 거다. 전혀 아픔이 없는 것.


요나스와 이레네는 12월 4일에 독일로 돌아가고, 정확히 일 년 뒤 요나스는 요니나와 마그누스에게 사진을 보낸다. 요니나가 요나스에게 마음을 뺏긴 일 년 전 12월 3일에 찍은 사진을. 마그누스와 이레네는 요니나가 요나스를 사랑하게 된 바로 그 순간 함께 있었다. 다들 어떤 일이 발생했음을 눈치 챘지만, 아무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기에. 


“희망찬 새해를!” 요나스가 말하고, “너희들에게 좋은 일만 있길, 너와 마그누스에게.” 이레네가 말한다. 그리고 요나스가 “우리 다시 갈 거야.”라고 한다. 어쩌면 그는 다른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메시지를 바로 지워버린다. (중략) 그리고 그녀는 말할 것이다. “마그누스. 그게 다였어. 이젠 괜찮아. 걱정하지마.” 그럼 마그누스는 “걱정 안 해. 도대체 뭘 얘기하고 있는 거지?”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일어났다. 단지 그 사실을 정확히 표현할 단어가 없는 것 일뿐. 우리는 안다. 언제고 다시 찾아들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시간이 흘러 다시금 동기와 배경이 마련되기만 하면 언제고 다시든. 사랑은 쉬이 흔들리고,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너무도 가냘픈 탓에 우리 자신조차 이를 배반하고는 한다. 때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아마도’라는 말이 남아 우리를 괴롭힌다. 상상에 한계는 없는 까닭에 한 번 시작된 흔들림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요니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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