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의 형식 - 보고 듣고 말하기 #17
한국 사회는 침묵을 잃어버렸다. 숙의(熟議)와 사유는 구석으로 밀려났고, 인상비평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제는 그마저도 최소한의 존재감을 상실하고 파편화된 인상만이 횡횡하고 있다. 숙의와 사유를 상실한 인간은 현상 앞에서 그저 즉각적인 반응만을 내보일 뿐이다. SNS는 아직까지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구축한 가장 위대한 대체현실이다. 가상과 현실의 어딘가에 걸쳐져 있는 그곳은 반응의 원리로 작동한다. 반응의 세계에 현실의 문법은 통하지 않는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수많은 SNS 포맷의 등장은 반응의 세계조차 끊임없이 분열되고 파편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현상과 반응은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듯 끊임없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현상이 곧 반응을 낳고 반응이 곧 현상을 낳기에 재현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현현의 충격을 감당해야 할 뿐이다. 구병모 작가의 소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침묵을 상실한 세대에 대한 관찰기이다.
살아가며 견뎌내야 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할 때, 파문(波紋)은 슬그머니 찾아든다. 경중에 따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지없이 삶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무너진다. 결국 일상은 자신의 무게를 견디는 과정이다. 내가 나의 무게에 눌려 발을 잘못 딛는 순간 평화는 처참하게 깨진다. 누구든 파국을 피할 도리는 없다. 고귀한 자이든 비천한 자이든 모두 각자만의 무게가 있고, 그런 연유로 각자만의 파멸을 점지 받는다. 우리는 생(生)의 잔해 속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가. 그 오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소설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잔해에 파묻힌 P씨를 호명한다. 그는 소설가답게 제 글과 말로 파멸을 불러낸다. P씨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한지 2년 남짓 되었다는 소설의 화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딱히 내세울 것 없는 문체와 살짝 빈곤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중략)⋯ 이후 꾸준한 중박으로 업계 입장에서는 뭘 해도 본전치기는 하겠다 싶은 작가가 그리 흔치 않지.”
P씨는 출판사에 있어서는 원소스멀티유즈가 가능한 가성비 뛰어난 작가이며, 독자에게는 글에 사유가 빈곤하여 소비하기 좋은 책을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P씨에게 P씨는 어떤 이였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P씨에 대한 화자의 평가는 그것이 과연 공정한 평가인지 궁금케 하기보다, P씨는 스스로를 어찌 평가했는지 알고 싶게 만든다. P씨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문제적 인간이라기보다, 인물을 다루는 P씨에게 문제가 있다. 그의 서사에 등장하는 이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이주결혼여성이라는 특수성이 도드라지는 인물이 등장함에도 P씨의 전형적이고 표면적인 해석 때문에 소설은 고루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대상의 표면만을 건드리는 그의 얕음이야말로 그가 대중적 성공을 거둔 비결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P씨를 재단할 때도 사용되는 근거 또한 지극히 얕다. 그러나 소설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P씨의 신간에 담긴 소수자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람들은 경악한다. 마치 이제 그 사실이 주목받을 차례가 된 것 마냥 P씨에 대한 비판은 순조롭게 이뤄진다. 그러나 P씨의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제기 역시 문제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소수자 집단에 속한 인물이 악역을 맡았다고 하여, 올바름의 잣대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항의는 반쪽자리에 불과하다. 앞선 주장을 펼친 이들이 소수자가 착한 역할을 맡았을 때도 문제가 된다고 화를 내니 말이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불쾌한 인간 유형을 등장시키는 것이 그리 찾아보기 힘든 일은 아니다. 문제적 인물이 불러올 파장과 논란에 대해 매력을 느낀 작가들은 늘 있어왔다. 설령 작가가 문제적 상황을 설정하고 풀어나간다고 하여, 세상의 추악함을 지지한다고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때때로 문제적 작품은 미학적 층위의 논의 대신 도덕적 차원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P씨를 플로베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 역시 보바리 부인이 겪은 수난을 그대로 겪는다. 물론 P씨의 소설은 못쓴 소설일 뿐이다. 미학적 문제제기야 얼마든지 이뤄져야 하지만, 그 논의가 작가를 향할 때 오독(誤讀)과 오도(誤導)가 발생한다. 텍스트가 그 사이에서 헤맬수록 말은 힘을 잃고 다만 공허해질 따름이다.
‘나는 너를 혐오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지난 몇 년간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12년 「일간베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이슈가 주목받으면서, ‘혐오’(嫌惡)는 더 이상 도발적인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유머코드와 결합된 혐오는 서사적 맥락과 사회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온 사회에 충격을 선사하였다. 혐오는 심각한 얼굴로 내뱉어질 필요가 없어졌다. 혐오를 혐오하는 것마저 혐오되는 이 사회에서, 차라리 혐오는 권리라고 말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명제가 매일 탄생하여, 소비되고는 끝내 다시금 태어난다. 혐오의 대상은 나날이 세분화 되어가고 확장되며 또 불분명해진다. 정치적 견해·성적 지향·빈부의 차·성별·출신지역·학벌 등. 모든 것은 혐오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혐오’란 사실 아무런 유의미성이 없는 텅 빈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P씨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종국에는 그에 대한 언급도 사그라든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자그마한 대체세계에서 우리의 실존은 혐오라는 기표를 소비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나와 너는 전혀 다른 주체라는 것. 민주주의의 근간인 타자와 자아의 구분을 우리는 이해와 공존이 아니라 혐오를 통해 이뤄내고 있을 뿐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혐오가 역설적으로 만인의 평등을 이뤄낸 것이다.
사람들은 P씨에게 절필을 요구한다. 사과나 반성이 아니라 그만 사라지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장편소설은 사람들의 비판을 신경 쓴 듯 다소 안전한 가족극의 소설이었지만, 그 역시 매서운 검열의 칼날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는 혐오되다 못해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조건만남을 해봤느냐, 집에서 아내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냐 등의 비소를 견디다 못한 그는 결국 항변한다.
“현실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 중이며 무엇보다 저한테는 아내가 없습니다.”
익명의 이름으로 글을 쓰던 P씨가 이제 현실의 자기를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현실의 문법이 통할 리 없다. 결국 여섯 번째 장편소설을 끝으로 P씨는 절필한다.
누군가의 혐오는 온전히 그의 것 만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의 혐오는 사회적 광기의 미시적 증상이기 때문이다. 당대의 혐오는 무논리의 영역이라기보다, 추가적인 사회적 관계· 타자의 개입을 거부하는 고립된 자아가 펼쳐놓은 폐쇄적 논리의 영역이다. 영국의 소설가 존 파울즈는 때로는 위대한 걸작보다 값싼 통속소설이 시대의 정수를 더 잘 담아낸다고 평하였다. 마찬가지다. 때로는 걸출한 위인보다 광기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른 광인이야말로 그 시대의 본질을 더 잘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이 추악하면 추악한 것일수록 말이다.
형식은 사람을 규정한다. 형식 자체를 뒤흔들 만큼 걸출한 이가 아니라면 대체로 형식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140자의 한계는 트위터라는 플랫폼의 한계이기 이전에,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한계이기도하다. 물론 적절한 제약은 뛰어난 창조의 밑거름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오로지 짧은 글만 읽히고 유통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리는 만무하다.
가까스로 보이는 것이 있다. 삶의 가장자리에 붙박여 있지만, 애써 보려 해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두 눈을 크게 뜨고 보기보다 가늘게 뜬 실눈으로 보아야 어렴풋이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는 것. 보통 삶을 괴롭히는 건 그런 것이다. 내밀하고 모호하여 타인은 물론이거니와 스스로에게도 좀처럼 설명할 도리가 없는 실루엣 말이다. P씨는 자신의 실루엣을 설명하고자 욕망했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규명할 수 없는 걸 밝힐 수 없다는 이유로 방치해두면 언젠가 탈이 난다. 당위에 존재의 근거를 의탁하기에 삶은 지나치게 병약하다. 문학 또한 올바름에 제 존재의 무게를 맡기기에는 더없이 위태로운 것이다. 누구든 스스로의 욕망과 긴장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면, 흘러가는 말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침묵을 잃은 사회에서 P씨만은 긴 침묵을 얻었다.
균형을 회복하기 전까지 말은 타래에 파묻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의 궤적을 맴도는 실루엣의 몽타주를 그려봐야 할 일이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질 차례다. 이 ‘혐오의 정치’에서 우리는 온당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