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안전가옥
*회사에서 한 달에 한 번, 한 달을 돌아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공개한다. 여기에 다시 포스팅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은 조금 수정했다.
2008년에 데뷔한 한 남자 아이돌 그룹을 참 많이 좋아했습니다. ‘소녀 팬'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을 떠올릴텐데, 제 기억 속 소녀 팬들은 두꺼운 전공책을 짊어지고 공연장 앞에서 프린트 물을 보던 또래 친구들이에요. 중고등학생의 팬질이 ‘학원 등등 정해진 스케줄에서 몰래 도망나오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면, 대학생의 팬질은 매 순간이 먼 미래(?)의 학점과 근미래의 오빠들 사이의 선택이며 모든 선택은 순전한 자유의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면에서는 더 위험합니다. 직장인의 팬질은 근미래의 연차와 먼 미래의 고과 사이의 더욱 위험한 선택이고요. 아무튼 그들 덕분에 서울 방방곡곡을 다녔습니다. 사실 서울만 다닌 게 아니에요. 밤도 많이 샜고요, 길바닥은 나의 집 나의 집은 길바닥이었습니다.
벌써 데뷔 13년 차가 되었고 그간 저에게도, 그들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도 길바닥 그 시절 같지는 않고, 이 아이돌 ‘판’이라는 것도 많이 변했죠.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도 바뀌었고, 나름 좋아진 것들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더 긴 세월을 함께 했어야 했는데, 이르게 떠나간 아티스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팬들이 원하는 것도 변했고, 팬들이 요구하는 것들도 바뀌었고, 아이돌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예상 범위도 많이 바뀌었고요. 이 모든 것에 대한 저 개인의 생각도 많이 변했습니다.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팬질을 하면서 가장 마음이 허한 순간은 정말 속속들이 알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어떤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펼쳐 놓은 좋아했던 마음을 거둬들여야 하는 순간이죠. 물리적으로는 사진을 지우고, 굿즈를 처분할 시간입니다. 이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의심하고 탓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좋아할 때는 마음 가는 대로 흘러 가기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앞으로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질 것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분별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좋아했던 마음은 진짜고 내 것이니까, 앞으로는 다 싫어 라거나, 내가 지금까지 다 틀렸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제가 제 손으로 직접 산 첫 번째 이상문학상 수상집은 한강의 <몽고반점>이 표제작인 2005년 모음집이었습니다.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좋아했던 수상집은 권여선의 <사랑을 믿다>가 실린 2008년,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가 수상했던 2012년에는 출간 소식을 듣고 퇴근길에 급히 서점으로 향했던 기억이 납니다.
매해 어떤 작품이 묶일지 기대하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작품들은 아름다웠고 한 시절의 저에게 참 큰 존재였는데, 그것이 착취 위에 쌓아올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영부영 끝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작가님들과 사람들이 주목하고 연대하고 있다는 것은 힘이 되지만,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일이니 아쉽고 안타깝고 죄송하고 화가 납니다. 무엇보다도 창작자들이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를 바라면서,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