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정돈된 거리, 유유히 흐르는 세느강 그리고 붉은 석양을 등진 개선문과 에펠탑. 존재 자체로 예술적 감성을 잔뜩 머금은 낭만의 도시 ‘파리’에 대한 길 펜더(이하 길)의 감탄사와 함께 시작되는 <미드나잇 인 파리>. 그의 전작들과는 다르게 작정하고 힘을 뺀 티가 뚝뚝 흘러내리는 우디 앨런의 이 작품은 아름다운 파리의 거리 위에서 벌어지는 백일몽이라는 단순한 틀 안에서 착실히 움직인 다. 동시에 그 속에 자리한 의외의 현실적 모습들과 엉뚱한 발상들은 너무나도 치밀하고 영리하게 각각의 자리에서 그 역할이 발휘되며,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힘을 싣는 일련의 당위성으로 작용한다.
우선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극을 가로지르는 ‘시간 여행’이라는 키워드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영화의 전개 내내 길의 내적인 부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며, 또한 그것으로 인한 인물의 행동 변화를 만들어내는 기제로 활용된다.
길에게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영화 속 길은 이상과 현실의 마찰로 인한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화려한 성공보다 그저 파리에서의 소박한 삶을 동경하며 탐닉하는 낭만적인 예술가인데 반해, 현실주의자인 그의 약혼녀를 비롯한 주변 환경들(강경 극우파인 이네즈의 부모님)에 의해 그의 의견이나 욕구는 번번이 무시당한다. 이러한 그의 위치에서 우연한 기회로 찾아온 자정의 시간 여행, 심지어 자신이 항상 동경해왔던 말이 통하는 20년대의 예술가들과 밤새도록 토론할 수 있는 꿈결 같은 시간은 길에게 억압되어있던 욕망의 배출구이자 이상 속 유토피아가 된다. 시간 여행을 현실과 환상으로 구분 짓는 것은 실상 그에게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길은 시간 여행으로 이전과 다른 자신을 성취하게 된다. 생각으로만 그치던 것들을 현실로 실행, 곧 행동하는 것으로 그는 내면적으로 한 단계 성장을 이룬다. 일전 로댕의 정부에 대한 폴과 도슨트와의 의견 충돌에서 질투심에서 비롯한 '거짓'을 내뱉었던 길은 시간 여행 후, 피카소의 그림을 두고 벌어진 폴과의 설전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fact)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모름에서 앎으로의 표면적 변화의 의미를 넘어, 길이 그 자체로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더 한 '진실'(truth) 이야기하게 된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사실'에서 '진실'로. 그렇게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그의 내적 성장은 영화의 후반, 약혼녀 이네즈를 떠남과 동시에 자신과 '코드'가 통하는 여자 가브리엘과의 새로운 만남을 가능케 한다)
현실과는 또 다른 세상. 한밤중의 길은 스콧과 젤다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과 같은 꿈에 그리던 거장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이상형의 여자인 아드리아나를 만나게 된다. 과거에 사는 그녀는 길에게 조금의 모자람 없는 풍부한 영감의 뮤즈 그 자체였기에, 그는 작게는 이네즈와 아드리아나를 크게는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과거에 대한 막연한 동경. 달콤함의 환상에 취한 길은 이내 아드리아나 쪽으로 그 마음이 기울어지지만, 10년대의 황금시대를 갈구하던 아드리아나의 모습에서 그리고 '현실은 지루하다'라고 말하는 로트랙과 고갱과 같은 예술가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어 아드리아나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길은 말한다. 과거가 더 좋았다는 환상은 없애야 한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유토피아는 없다는 사실과 그것의 서늘한 ‘한계’ 확인. 이렇게 불만족과 동경의 반복적 상관관계를 직시함으로 길은 두 번째의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
마침내 길은 그렇게 현실과 대면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에 빠져든 이유와 나아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생각하다 결국 아드리아나와 이네즈, 두 여자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으로 답을 내린다. 자신의 신념을 자신 나름의 방식으로 인정하는 것. 이렇게 길은 헐렁한 예술가에서 똑 부러진 예술가로 한 단계 더 진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는 주인공인 길 펜더의 성장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비 오는 거리를 걷는 길.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친 골동품 가게 직원 가브리엘. 빗속을 함께 거니는 둘의 뒷모습에서 애틋함이 피어오른다. 우디 앨런은 이 미장센으로 우리의 삶 역시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저 만족하며 살아가는 한다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 또한 말처럼 쉬운 것이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