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
공공연히 취미가 독서라고 밝혀서 그런지, 종종 인생을 바꾼 책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몇년 전 소개팅에서도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독서라 답했더니, 같은 질문이 돌아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책을 꼽았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남자는 대답이 굉장히 의외라면서도 책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는 몇차례의 데이트를 더 한 이후 사귀게 되었다.
태백산맥은 10권에 달하는 대하소설로,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까지를 다룬 이 책은 독자를 단숨에 그 시대로 끌고 가 다양한 군상들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바라보게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경험했다.
이 책을 읽기 전 나에게 북한이란 공산주의라는 이미 한물간 이념을 허울로 독재주의를 덮은 이웃나라, 한 민족이라는 말은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의미없는 개념이었다.
태백산맥의 등장인물들은 달랐다. “항꾼에”, 함께 살기 위해 좌파를 선택한 소작농, 지리산 자락 벌교에서 시작해 온 한반도 산기슭에서 계속되는 빨치산 투쟁과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하고 시대에 휩쓸려가는 중도 지식인의 삶을 15700매의 원고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가 나에게 온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게 된다. 너라면,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태백산맥을 꼽는 내가 멋있어서 사귀고 싶었다는 남자는, 몇개월 뒤 나는 내 의견에 토달지 않고 yes라고 해주는 여자가 좋다며 헤어짐을 고했다. 조정래 작가는 자식이 결혼하겠다는 상대에게 전체를 필사하기를 요구했다고 한다. 내가 더 이상 이 책을 인생을 바꾼 책으로 꼽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제 이 책에서 여성혐오, misogyny,를 읽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 책에는 쓸모없는 정사 장면이 많다. 여성에 대한 대상화는 이로 말할 것도 없고. 특히 부자집 아들인 정하섭과 무당의 딸 소화의 관계는 갑과 을의 정사 외에 뭐가 더 있을 지 의미를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는 부연적으로만 쓰인다. 며느리에게 필사를 시킨 이유는 인생이란 성실하게 노력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좋은 이유다. 내 배우자의 부모가 그런 것을 요구했다면 바로 이별을 고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예비 배우자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그걸 요구하는 권력을 본다.
처음 이 책을 읽은건 중학생때였고, 고등학교 때 작가의 다른 대하소설인 아리랑과 한강을 다 읽었다. 이후에도 작가의 소설은 대부분 읽었다. 태백산맥은 대학때까지만 해도 방학이면 꺼내보는 책이었다. 많이 좋아했다.
작가를 탓하는 것도, 작품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시대가 변했고, 내가 변했다.
하지만 정말, 좋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