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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Jan 03. 2019

브리스톨의 빨간 바지

누구에게나 인생은 2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5캐럿의 재산을 가지는 대신 20캐럿 짜리 튼튼한 건강이 있고, 또 누군가는 재산이 20캐럿이지만 건강과 사랑같은 것은 5캐럿 밖에 안된다는 거지요.


우리의 시마 과장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한 사람이 평생 누리는 기쁨, 슬픔의 한도는 정해져 있어서 일종의 제로썸게임 같은 거라고 하더군요. 지금 만약 슬퍼하고 있다면 미래의 슬픔은 소진되고 있으므로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위로같은 것이지요. 물론 잘생기고 보는 여자들마다 환상의 육탄공세에, 능력까지 좋아서 금방 사장이 된 시마를 보더라도, 50캐럿짜리 인생은 따로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어쨌든 그런 시마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는 못했으니, 50캐럿 짜리든 5캐럿 짜리든 누구나 크고 작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영국의 우기가 시작되는 가을, 어버버한 석사 1학기를 마치고 떠난 곳은 영국남단, 브리스톨(Bristol)이었습니다. 브리스톨은 영국 남부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데요, 하루종일 비오는 브리스톨을 혼자 걸어다닌 탓일까요. 멜랑꼴리 모드였습니다.


여행할 땐 늘 책을 한 권 챙기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 긴 이동시간이 없으면 읽게 되진 않더라구요. 커피를 마시러가도, 벤치에 앉아있어도, 보게 되는 건 책 대신 사람들입니다. 


부슬 부슬 비오는 브리스톨 거리. 

걷기에도 지쳐 벤치에 앉아 돌아가는 교통편을 생각하던 중, 저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빨간 바지를 발견했습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 속에서 운동화, 야상 잠바를 걸치고 오만하게 담배를 피고 있던 빨간바지의 그녀. 바로 아래의 여자입니다.

담배연기를 빗속으로 뿜으며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앉아있던 그녀. 이렇게 대충 입고 비스듬히 앉아있어도 왠지 아티스틱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빨간 바지 때문인지, 길게 앉아 거만하게 담배를 피는 자세 때문인지 꼭 먼가 있어 보입니다.


사진을 찍었더니 그녀,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엥? 


눈도 마주쳤슴다. 

모르겠다, 공격은 최선은 방어랬다, 먼저 말을 걸어봅니다. 

"너, 혹시 기차역 가는 길 아니?" 


보기보다 별로 유창하지 않은 영어. 자기 집이 그 쪽에 있으니 같이 가겠냐고 합니다. 너무 친절하니 갑자기 무섭지만, 이럴 땐 안 무서운 척, 슈어~. 그리하여 폴란드에서 한달 전, 막 영국으로 건너온 파트리샤와 함께 비오는 브리스톨을 걷게 되었습니다.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아직 제대로 된 헬스클럽에 취직을 못했고, 지금은 임시직 청소부로 일하고 있답니다. 왜 영국에 왔냐고 물으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게이 친구따라 영국 왔다네요.


담배필 때의 카리스마는 어디가고, 오늘은 참 힘들었다고 하네요.


외국 사람들, 속마음 쉽게 얘기 안하죠.

‘How are you?’ 하면 대부분 

‘Great’, ‘Fantastic’입니다.


우리는 지친 저녁, ‘오늘 어땠어?’ 하면 ‘피곤해’, ‘열라 짜증나’ 이런 말이 더 자주 나오지 않나요? 

‘정말 놀라웠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이런 말 어디 나오나요? 설사 그렇게 어매이징한 하루였대도 그렇게 대답하는 경우는 드물죠. 


전 외국애들이 '하와유?' 하면, 우리 식으루다가 '좌절이지 모', '테러블했어' 이렇게 대답했다가 

외국애들이 당황하곤 했어요. ^^; 그땐 하와유가 '안녕하세요'에 가까운 표현인지를 잘 몰랐어요.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안녕하세요?에 '짜증나' 이렇게 대꾸하지는 않죠. '하와유'에 대한 대답에 '파인 땡큐, 앤듀'만 있는 이유가 있었답니다. ^^;)


어쨌든 파트리샤도 브리스톨에서는 외국인일 뿐이네요. 타향에 건너와 혼자 살아보는거, 일단은 재밌는 경험이지만, 어디 재밌기만 한가요. 

말 안돼, 

먹고 싶은거 못먹어, 

마음 나눌 친구도 없어... 

우울해지는 때도 무지 많죠.


그런 날들 중 하루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이라서일 수도 있겠죠. 묻기도 전에 자기 얘기, 오늘 혼자 힘들었던 얘기를 더듬거리는 영어로 계속 합니다. 


한참을 같이 걷던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졌습니다. 

서로 굿럭을 빌어주면서.


돌아가는 파트리샤의 뒷모습을 살짝 뒤돌아보니, 빨간바지의 그녀는 여전히 거만해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만한 겉 모습은 약한 내면을 가리기 위한 좋은 방어 수단인지도 모르겠어요. 


돌아오는 길에는 기분이 좀 나아졌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어떤 유대 때문이었을까요. 브리스톨 여행은 늘 비오는 거리를 함께 걸었던 파트리샤와 함께 떠오릅니다.


참, 

파트리샤는 폴란드에서 태권도를 이년간 배웠는데, 한국인 ‘킴영수’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파트리샤가 아는 우리말은 '안냐세요' 대신 ‘하낫! 둘! 셋!’ 이었습니다.


한국인 김영수씨, 폴란드 빨간바지 파트리샤가 애타게 찾고 있으니 브리스톨에 있는 파트리샤에게 

연락하십시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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