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안다. 나는 첫 눈에 하등 눈길을 끌지 않는 평범녀라는 사실을. 하지만 가끔은 사람들을 붙잡고 나를 소개하고 싶어진다. 나는 성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그래, 솔직하자면 게으름뱅이에 노는 것만 좋아하지만, 그러나 저러나 꾸역꾸역 성실한 것처럼 인생을 살아왔다고. 아무리 놀아도 적당히 흐르는 범생의 피는 내가 완전히 엇나가는 것만은 막아주었다고. 적당한 회사에서 적당한 경력을 쌓은 적당적당녀가 되었지만, 그래도 보면 볼수록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말이야, 아무도 이런 매력을 처음에는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아픔이야.
그래서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백화점에서, 이 썬글라스, 저 썬글라스를 백 번쯤 껴본 후에 드디어 크게 맘을 정하고, 여보세요, 점원님, 이 썬글라스 살게요, 했더니만 거만한 점원은 나를 흘긋 보더니 돈 한 푼 없는 아시안 여자 쯤으로 생각하고 그거밖에 없다며 손때 묻고 기스간 전시용 썬글라스를 사던지 말던지 니 맘대로 하라는 듯 무시때리는 못돼쳐먹은 행동을 한 거잖아.
옆에 보니 조금 나이들은 직원이 있다. 다시 말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쁜 안경 케이스에 조심조심 담겨진 새 썬글라스를 받아들었을 즈음에야 끓어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컴플레인을 한거지.
나: (겉으로는) 너 아까 없다고 했는데 다른 직원이 가져다주었어. 너 왜 그랬니?
나: (속으로는) 너 지금 나 돈 없는 아시안처럼 보여서 무시하는거야? 야! 콱! 마!
그랬더니 거만한 그녀는 옆의 점원에게 쏼라쏼라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로 잠깐 얘기하더니, 외국애들 아무때나 갖다붙이는 동작 -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딴 일 하더라. 부글 부글 끓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그 못된 애를 어찌하지 못하고 걍 루시 류의 쭉 찢어진 아시안눈을 해가지고 계속 꼴아봐주었다는 것 정도가 내가 한 복수의 다야.
물론 마음 같아서는 "너 이름이 뭐니? 매니저 당장 불러! 이 씨방새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도 안통하는 스페인에서 나는 철저한 약자였어. 아마도 그때 내 행색이 초라한 가난뱅이 배낭여행객 같아서 지레 그만두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땐 당장 호텔까지 돌아가는 길도 헷갈리는 상황이라.
'워렌하딩의 오류'라는 게 있다고 한다. 첫눈에도 사장으로 보이고, 대통령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 미국의 워렌하딩은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었지만, 그의 아우라는 어찌나 대통령 같았는지, 누구든지 한 번만 그를 보면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다는 거야. 그런가하면 아무리 내면을 갈고 닦아도 동네 맘 좋은 아줌마의 첫인상에서 벗어나기 힘든 경우도 있다는 거지.
그래서 꼭 스페인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막 말하고 싶어진다니까. 그러니까 나를 괄시하지 말라고. 그래서 나같이 억울한 누군가가 해괴망칙하게 ‘내가 누군줄 알아?”라고 절규하는 게 아니겠어.
그렇다고 도지사쯤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기 명함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촌스러운 수작보다는, 그런 것에 “So What?” 하며 권력 앞에 아돈케어 하는 사람이 오히려 쿨해보이니까 이거 참 답답할 노릇이네.
그러니까 내가 아이참, 굳이 수줍게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나를 드러내주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한다는 거지. 얘는 등급 A, 얘는 등급 B라는 표지 같은 것. 아, 생각해보니 그 등급이 바로 그 사람의 차림새인가 보다. 그래서 그렇게 사람들이 명품에 환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아도 아~~라~요.
항상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조심해야겠어.
어느 욱한 날, 이거 왜이래, 나 홍제동 통장이야, 나 OO초등학교 분단장 출신이야, 라고 소리지르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