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뉴 (Tignes).
프랑스 남동부, 이태리와 스위스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알프스 자락의 스키마을.
한 학기를 마치고 난 늘지 않는 영어와 꿀먹은 벙어리로 참여하지 못하는 토론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우울이 극한에 이르고 자존감은 이미 바닥을 친 상태였다. 그나마 조금 친해진 러셀, 조셉, 코헤이의 무리에 끼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평점심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때 우리 기수들이 함께 떠난 곳이 알프스 티뉴Tignes였다.
그곳에서 매버릭과 나, 그리고 감초처럼 항상 내 옆에 있던 티나는 함께 보드를 배웠다. 넘어지고 넘어져 온 몸이 멍으로 뒤덮여 눈위에 널부러져 있다가 몇초간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가면 먼저 내려간 매버릭은 나에게 Beautiful Boarder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종일 스키를 타고 저녁엔 다 같이 알프스 산자락의 통나무집에서 모였다.
영국에서 날아온 특급 쉐프 - 영국 요리사라니! - 의 요리, 메인부터 데카당트한 디저트까지 맛보다가
어느 날 밤은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알프스 산자락에서 눈썰매를 타기도 하고, 어느 날 밤은 마음에 맞는 몇명과 그 작은 마을을 거닐다 근처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기도 하고, 옆의 작은 마을로 가 퐁뒤를 먹기도 하던, 하... 끔찍하게 비현실적인 기억들이군.
마지막날 저녁, 다른 날과 다름없이 나와 티나는 스키를 타며 눈밭을 구르고나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 녀석은 우리 기수의 존잘남 제임스와 꽤 친한 편이었다. 우연히 내 앞에는 제임스, 티나 앞에는 매버릭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제임스가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갑자기 매버릭에게 자리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매버릭과 마주앉게 되었고 그 녀석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저녁을 먹자, 마지막 클러빙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물론 가기 싫었다. 이유는 뻔하다. 난 춤을 못추는 몸치에 영어도 못하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데 영어가 무슨 필요냐고 하면 그게 또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겠다.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 춤도 못추는 것이니까. 도대체 내가 클럽에 가서 할 줄 아는 것이 무어냔 말이다. 외국인들은 이상하게 타고난 춤꾼들도 많다. 신기하지...
그런데 그날 따라 유독 티나가 나를 부추겼다.
티나 왈, 제임스가 일부러 매버릭과 밥 먹던 자리를 바꿨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가, 평소같으면 난 클럽에 가지 않았을텐데, 그날 나는 클럽에 갔다. 히키코모리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던 내가 클럽에 갔다. 바닥을 친 나의 에고가 점점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못 추던 춤이 살아날 리는 없고, 나는 테이블에 앉아 맥주만 홀짝거렸다.
그런 내 옆으로 매버릭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