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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킵고잉 Jun 20. 2023

[밴쿠버 한달살기 18] 밴쿠버에서 난 왜 행복했나

오늘은 한국에서

굿모닝~

밴쿠버 한달살기를 끝낸 후, 익숙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출근을 안하므로, 이전과는 좀 달라진 모습의 일상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밴쿠버 한달살기를 복기해 보았습니다. 여행 다닐 만큼 다니고, 출장 다닐 만큼 다녔는데, 왜 밴쿠버에서 저는 다른 여행에서보다 만족스러웠는지 궁금하더라구요. 요 몇 년간은 여행도 피곤하다~고 생각할 즈음이기도 했기 때문에요.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두둥~! 밴쿠버에서 난 왜 행복했나.


1. 숙제가 없는 여행이었다.

회사 다니며 보통 1주일 - 10일 정도 휴가를 갈 경우는 매일의 일정이 빡빡했습니다. 출국 날, 귀국 날 빼면, 정작 즐길 수 있는 시간은 5일 - 8일 정도. 게다가 첫 며칠은 시차 때문에 컨디션도 좋지 않고요. 와중에, 이 짧은 시간동안 본전을 뽑자는 심산으로 최대 효용을 위해 매일 빡빡~ 한 여행을 했었는데요.

보통 삼시 세끼만 챙겨먹어도 하루가 가잖아요. 이 짧은 시간에 액티비티 끼워넣고, 또 억지로 휴식도 끼워넣긴 하는데, 이 휴식조차 굉장히 목표지향적이었습니다. 오늘 오후는 풀장에서 수영하며 휴식하기~, 오늘은 멋진 카페 가서 멍 때리기~ 등. 휴식조차 시간 제한이 있는 액션 아이템이었던 것이죠.

그냥 일정표에 아무것도 없는 빈 일정, 이거야말로 정말 궁극의 사치였습니다. 울트라 초부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시간 부자의 삶, 한달살기가 이걸 가능하게 해주더라구요. 진짜 부자? 바로 시간 부자입니다.



그냥 캘린더에 뭐가 없는 게 그렇게 좋더라구요. 하루 뭐 하면, 그 다음날에는 좀 쉬어주고. 이런 자유로움이 가장 큰 행복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사회인이 아니라 존재로서 인간 본연의 행복, 여기에 조금 더 가까웠던 생활이 아니었나 싶어요.



2. 날씨의 축복

누군가의 말처럼, 인상파가 왜 나왔는지 이해가 되는 놀라운 날씨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5월 초에 밴쿠버에 들어오고 나서 며칠 후에 비가 한번 왔어요. 그날도 평소처럼 도서관 갔다가 테니스라켓 사겠다고 버나비까지 찾아가고 매우 바쁜 날이었는데요, 그날은 좀 우울하더라구요. 여행하다보면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는데, 밴쿠버 여행에서 그런 생각이 든 적이 딱 하루 있었고 그날이 바로 이 비가 온 날이었습니다.

다행히 제가 있던 동안 비온 날은 그날 하루였고, 그 다음날부터 환상적인 날씨가 계속되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하늘 보고 탄성만 나오지, 내가 여기서 뭐하지 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날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가을 넘어가면 또 비오는 축축~~ 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하니, 그때 밴쿠버에 있다면 밴쿠버가 좀 싫어지기도 할까요? 겨울에는 스키 탈 수 있으니까 또 신나질까요. 여튼 밴쿠버의 5 - 6월만 경험한 저에게 날씨는 제 한달살기에 내려진 어마어마한 축복이었습니다.



3. 느슨한 친구

예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잠깐 산책 같이 하거나 수다떨 수 있는 정도의 느슨한 관계가 인생에는 꽤 중요하대요. 아주 깊이있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소소한 일상 얘기로 수다 떨 수 있고, 같이 운동이나 놀이 같은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몇 있으면, 행복해진다고요.

밴쿠버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테니스 수업을 들으면서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고, 또 우연히 헬로밴에서 만나 테니스를 함께 치며 나중에는 술도 함께 했던 예일타운 샤라포바, 그리고 헬로밴에 밴쿠버 여행기를 올리면서 약간의 유대가 형성된 분들이 생겼는데요. 이런 느슨한 호감이 있는 관계, 만나면 좋고 안만나도 좋은 이런 관계가 제 여행에 꽤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이전에는 여행을 가서 다른 여행자를 만나 서로 연락처나 SNS를 주고받았다고 해도, 늘 단발적인 만남으로 그치고 여행 후에 연락을 한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짧은 만남이더라도 정기적인 관계, 지속성이 있는 관계가 중요한 것 같아요. 게다가 헬로밴에서 비상연락처를 받기도 해서, 뭔가 밴쿠버에서 사건에 휘말린다고 해도, 영사관 외에 어딘가 연락할 곳이 있다는 점이 마음의 짐을 덜어준 것 같습니다.
(저에게 비상연락처를 주신 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4. TV에서 멀어짐

밴쿠버 여행을 곰곰히 복기해보다 떠올리게 된 점인데요.
저는 원래 미디어 중독에 가깝게 새로 나오는 드라마, 예능을 모두 섭렵하고 다니고, 남들보다 빨리 보고, 그걸 전파하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여러 숙소를 다니면서, TV를 보질 못했어요. TV가 있다고 해도, 이게 영어방송이다보니 잘 안봤을 게 분명하지만, 원천적으로 TV가 있어도 안나오는 곳이 많았습니다. (아니면 제가 TV 리모콘 조작법을 몰라서 못틀었을 수도...) 심지어 캐나다에 큰 불이 났다는 얘기도, 티비가 아니라 카톡으로 누군가 물어봐서 알았습니다.

또 저는 TV 만큼이나 인터넷 쇼핑도 허구헌날 들어가서 뒤적대던 사람인데요. 뭐 캐나다에선 인터넷 쇼핑에서 물건을 살 수가 없잖아요. 미디어도 안보고, 인터넷 쇼핑도 안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넷의 바다에 빠져서 쓸데없이 연예계 뒷소식이나 기웃거리게 되는 부작용도 없어지고... 강제적으로 디지털 디톡스, 쇼핑 디톡스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책 빌리러 도서관이나 카페에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다보니, 쓸데없는 온라인의 자극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졌고, 오프라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진 것 같아요.



한국에 오자마자 기안84의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인도편'을 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보고나서, 또 TV 리모콘을 여기저기로 돌리며 하하호호 떠드는 TV 예능을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조금 휑~ 해진 것 같은 허무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건 제가 밴쿠버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허한 감정이었고, 평소에 한국에서는 종종 느끼기도 했던 것이었습니다.
TV 덕후인 나, 인생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TV를 없애자....'
(음, 태계일주 2편 일단 보고...)


5. 휴가가 끝나도 나를 기다리는 일이 없다?

이건 퇴사자인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지만, 한달살기 후 돌아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업무나 보스로부터의 압박감 (휴가 갔다 왔으니 일좀 해야지??) 같은 것들이 없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휴가를 다녀오면 당분간은 야근을 하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나의 충성도를 시각적으로 보여줘야겠다,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밴쿠버 자유의 끝은 또 다른 완전한 자유였죠. 오히려 아무 할 일이 없는 무위고에 시달릴 수도 있는 총체적으로 다른 상황이었으니, 여행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압박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6. 도서관 청년이 쏘아올린 쏘큣걸

이건 빼놓을까 하다가, 이 부분도 밴쿠버 여행의 만족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단 써놓습니다. 뭔가 밴쿠버에서는 회춘한 것 같은 느낌적 느낌... 한국 사회에서의 공고한 정체성 - '중년의, 일하는, 아줌마 여성'에서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의 회복... 이건 분명히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젊어지고 싶으신가요? 밴쿠버로 가세요!

젊어진 개구리


아무튼 밴쿠버에서 행복했던 원동력 6가지가 위와 같았습니다. 그중 2가지가 일과 관련된 것이었으니, 제가 다시 한달살기를 하더라도 이번 여행 만큼 만족하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최고로 만족스런 여행을 하고 싶다면, 일단 퇴사를 하고 떠나라? ㅎㅎ 사람마다 또 일 속에서 휴가를 가야 더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분들도 있으니, 이건 개인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한달살기 여행의 만족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숙소였는데요.
이번에 한달동안 무려 7개의 숙소를 전전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다음에 비용과 함께 한번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강릉 사천바다로 마무리.
밴쿠버를 떠난 아쉬운 마음을 강릉 바다로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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