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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윤 Jun 21. 2023

초여름 확실한 행복

휴직 14주 차 기록




따뜻함과 뜨거움이 적절하고, 연두색과 진녹색이 적당히 섞인 초여름. 여름의 시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다. 생각해 보면 회사엔 공식 여름휴가는 있지만 초여름휴가는 없다. 물론 신입사원 때 빠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던 적도 있지만, 다들 휴가를 가는 7~8월에 연차를 쓰지 않았을 때 '어디로 가냐, 누구랑 가냐, 왜 빨리 가냐'와 같이 몰려드는 관심이 불편했다. 그 기억 이후론 '여름휴가는 그냥 웬만하면 남들 다 갈 때 가자. 튀지 말자. 한 달만 더 버티면 앞뒤 휴일 붙여 9일 쉰다. 버티자' 다짐했다.


그러다 보니 제일 좋아하는 초여름의 여행 기억이 별로 없는 것이 아쉬웠다. 순간의 힘듦 속에서도 쉬어가는 주말들을 종종 가지긴 했지만,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다녀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휴직을 시작할 때도 초여름엔 꼭 시간을 내어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휴직 후 첫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 애기도 없고, 특별히 할 것도 없으니 해외에 길게 다녀오라는 두 아이의 엄마인 친구의 부러움이 섞인 조언을 들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다. 지난해 근속 10주년 휴가로 남편과 호주에 다녀오기도 했고, 무급 휴직 중인데 여행에 큰돈을 쓰는 게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남편은 괜찮다고 하겠지만 내가 안 괜찮은 것을 어쩌겠나). 그리고 비행공포증이 심한 편이라 비행 후 몸과 마음이 많이 무너질 것을 잘 알기에, 잘 유지해 온 요즘의 평온함에 변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된 곳이 강원도다. 부산 30년, 대구 4년. 경상도에서만 30년을 넘게 살고 이제 서울생활 5년 차에 접어드는 나에게 강원도는 신비의 땅이자 가도 가도 계속 또 가고 싶은 곳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양양 낙산사에 간 것이 첫 강원도 여행이었고, 그 이후로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강원도를 가게 되었다. 서울에 이사를 와서 좋은 점이 문화생활도 인프라도 아닌 '강원도를 자주 갈 수 있다는 것' 일 정도로 강원도가 좋다. 언제 다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갈지 모른다는 강박에 서울로 이사온 후엔 매년 강원도에 다녀왔지만, 초여름 강원도는 처음이니까- 하는 핑계로 이번에도 별 수 없이 또 강원도다.


그 간 보냈던 여름휴가도 회사에서 크게 전화가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내 머릿속 한편에 늘 업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신나게 놀다가도 집에 가는 차 안에선 답답함과 무기력이 정신병처럼 수시로 찾아왔었다. 내 휴가들은 적응할만하면 끝이 났었던 것 같다. 복귀 첫날 3시간이면 완벽하게 적응해 또 그 다음해 여름휴가를 기다리고의 반복 또 반복이었다.


이번 휴가는 그 모든 것에서 해방되기로 했다. 잠을 못 잘 까봐, 못 일어날까 봐, 내일 아침 컨디션이 망가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마시던 디카페인 대신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로 (호기롭게 마시고 그 후로 다시 원래의 컨디션을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제대로 된 수영복 입어보기로. 여기 갔다 다음은 저기 갔다 숙제처럼 여행하지 않기로. 왜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여름이니까!


동생이 준 숙박권 덕에 인피니티풀이 있는 좋은 호텔에서 한 밤 묵을 수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내 모습에 나 말고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곳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보는 노을 덕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조금은 편안하게 풀렸다. 여행 전 남아도는 시간과 여유에 생각이 많아지면서 과거 아니 최근까지도 나에게 무례했던 인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인간혐오증이 오기 직전이었던지라 (아니 이미 온 듯), 그냥 쉬자. 편히 쉬자. 하며 따수운 하루를 보내고 푹 잤다.


강원도 여러 도시 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강릉. 아침부터 전시회를 보고, 해가 잘 드는 오죽헌 정자에 가만히 앉았다. 바람이 흔들고 가는 나뭇가지 소리, 더운데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근처에 강릉의 시그니쳐인 초당옥수수커피를 판다고 해서 먹었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맛있다. 점심 겸 저녁은 장칼국수. 내 야식은 과자, 오빠는 맥주.


다음 날은 대관령 양떼목장과 양양 휴휴암. 동물은 무서워서 기겁을 하지만 울타리 안에 가만히 있는 양들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나와는 달리 동물이 너무 좋은 오빠는 양들 먹이를 샀다. 양들도 맛있는 연한 건초만 골라서 먹는다는 사실 (사람이나 양이나 맛있는 걸 좋아해). 돌아오는 길에 들른 휴휴암. 동해바다를 등지고 있는 큰 불상이 용을 타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쉬고 또 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절. 어리석은 마음, 증오, 질투, 시기를 다 내려놓으라는 절이라고 한다. '어려운 건 알지만, 다 내려놓게 해 주세요.' 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저녁으로 회를 먹고 낙산해변을 쭉 따라 걷는데 달이 유난히 환하다. 달력을 확인하니 음력 4월 15일 보름이다. 절에서 내려놓고 왔지만, 보름달이니 또 소원을 빌어줘야 한다.


'제 상처가 치유되게 해 주세요. 미워하지 않게 해 주세요. 경험한 것만 믿게 해 주세요.'


내 사랑 6월. 초여름. 여름의 시작에서 행복했던 시간들.

회복되고 있는 것 같은 하루하루가 여러모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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